앤드루 왕자, 스파이 의심 中 사업가와 가까운 정황 드러나
버킹엄 궁전·윈저성 등 주요 왕실시설에 초대받아 드나들어
英 정보기관 M15, 中 사업가 공산당 통전부 소속으로 ‘확인’
중국 정부, “황당하다”며 사업가의 스파이 의혹 강력히 부인
영국 정가가 중국 스파이로 발칵 뒤집혔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인 앤드루 왕자가 스파이로 의심되는 중국 사업가와 가까이 지내며 버킹엄 궁전과 세인트 제임스 궁전, 윈저성 등 주요 왕실시설에 초대한 사실이 드러난 까닭이다. 특히 이 사업가는 전직 총리들과도 만난 사실이 알려지며 영국 정계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중국 스파이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앤드루 왕자는 오는 25일 크리스마스와 같은 왕실 가족모임뿐만 아니라 다른 왕실 가족모임에도 불참한다며 ‘중국의 입김’이 영국 지배계층에 침투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영국 BBC방송과 일간 더타임스 등이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국 왕실 가족들은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 당일에 해마다 샌드링엄 영지에 모여 성탄을 축하하는 모습을 영국은 물론 전 세계 미디어에 공개한다.
왕실 소식통들은 앤드루 왕자와 그의 전처인 세라 퍼거슨 요크 공작부인이 오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샌드링엄 영지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BBC는 "앤드루 왕자가 왕실 행사가 방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행사에서 명예롭게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며 "크리스마스에 윈저성의 집에 머물 것"이라고 전했다.
그의 이 같은 행보는 스파이로 의심되는 중국인 사업가가 자신에 대한 입국금지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이 과정에서 앤드루 왕자가 그와 가까이 지내며 버킹엄 궁전과 윈저성 등 주요 왕실시설에 초대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데 따른 것이다.
‘H6’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문제의 중국 사업가는 양텅보(楊騰波·50)라고 영국 법원이 15일 공개했다. H6의 존재는 안보상 위험인물로 분류돼 영국 입국이 금지되면서 알려졌다. 그는 자신에 대한 입국금지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영국 내무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가 14일 패소했다.
영국의 이민문제 담당 재판소인 ‘특별이민항소위원회’는 영국 국내정보국(MI5)이 양을 중국 공산당중앙 통일전선공작부(統戰部) 소속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판결문에서 “지난해 수엘라 브레이버만 당시 내무장관은 이 사업가가 영국의 국가안보에 위험요인이 되며 영국 입국금지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강조했다.
이에 양은 16일 "아무런 잘못되거나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며 "나를 스파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1974년 중국 윈난(雲南)성 출신인 그는 윈난대를 졸업하고 국가기관에서 7년간 근무했다. 2002년 학생 자격으로 영국에 건너와 1년간 런던에서 공부한 뒤 요크대에서 행정학과 공공정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햄프턴 그룹 인터내셔널’을 설립해 영국 기업의 중국 진출을 조언하는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2013년 5월 영국에 영주권을 받았다. 하지만 2021년 11월 공개되지 않은 이유로 입국에 제동이 걸렸고, 영국 정부에 휴대전화와 기타 디지털 기기도 넘겼다. 그는 2022년 2월 영국 정부가 자신의 데이터를 보관하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한 법적 소송을 제기했으나 항소에서 패소했다.
지난해 3월 브레이버만 내무장관은 양의 영주권 취소하고 그를 영국에서 추방했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양은 곧바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판결문에는 내무부가 양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데 영향을 준 증거 중 일부가 포함됐다. 영국 정부는 2021년 그가 체포될 당시 압수한 디지털 정보에서 양이 통전부 등 중국 공산당과 연결된 내용을 확인했다.
내무부는 그가 중국 공산당 통전부와의 연계를 의도적으로 은폐했으며 양의 설명에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양이 영국의 이익에 간섭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가 중국 공산당의 목표를 이해하고 임무를 받지 않고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영국 법원은 일부 혐의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MI5가 양이 국가안보 위험을 초래한다는 결론을 정당화할 만한 충분한 자료가 있다”고 판결했다.
양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 등 영국 고위 정치인들의 후원을 받는 영·중 경제교류 모임인 ‘48클럽’의 회원이라는 점도 알려졌다. ‘48클럽’은 영국과 중국간 무역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런던에 있는 저명한 영국 고위 지도자와 정치인들로 구성된 그룹이다.
그가 접촉한 인물 중에는 데이비드 캐머런과 테레사 메이 전 총리를 각각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들과 찍은 사진을 자신의 런던 사무실 책상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전 총리 측은 사진이 언제, 어디서 찍혔는지, 또 해당 남성이 어떤 사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는 조지 오스본 전 재무장관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앤드루 왕자는 양과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라는 정황이 드러났다. 그는 양을 버킹엄 궁전에 두 차례 초대했으며 세인트 제임스 궁전과 윈저성의 행사에도 참석하도록 주선했다. 윈저성 부지 내 앤드루 왕자의 저택 로열 로지에서 열린 자신의 생일 파티에도 그를 초대했다.
앤드루 왕자의 수석 고문인 도미닉 햄프셔가 2021년 3월 양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를 왕자의 생일파티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햄프셔 고문은 “왕자의 가장 가까운 내부 심복들을 제외하면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앉고 싶어하는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편지에는 양이 앤드루 왕자의 대리인으로서 중국의 잠재적 파트너 및 투자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앤드루 왕자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앤드루 왕자와의 통화에서 나온 주요 논의사항을 나열한 문서도 발견됐다. 여기에는 왕자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무엇이든 붙잡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앤드루 왕자 사무실은 성명을 통해 “왕자는 정부의 조언에 따라 해당 인물과의 모든 접촉을 중단했다”며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만남이 이뤄졌으며 민감한 성격의 내용은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왕실 소식통은 찰스 국왕이 앤드루 왕자와 중국 스파이의 관계에 대해 보고받고 격노했다고 전했다. 앤드루 왕자는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둘째 아들이다. 해군에서 복무하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가해 한때 국민적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미국의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가까운 사이로 성 추문에 연루돼 모든 왕실 업무에서 배제된 상태다.
상황이 중국에 친화적인 노동당에 대한 보수당 등의 공세로 번지자, 노르웨이를 방문 중인 키어 스타머 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관련 질문에 "우리는 중국이 제기하는 도전에 대해 우려한다"라고 시인했다. 스파이 사건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그는 그러나 "우리(노동당)의 접근 방식은 기후변화와 같이 협력해야 할 부분에서 협력하고, 맞서야 할 부분에서는 맞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는 “황당하다”며 양의 스파이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린젠(林劍) 외교부 대변인은 17일 정례 브리핑에서 "이른바 '중국 간첩'이라는 고발은 무척 황당하다"며 "나는 여기에서 중국과 영국관계의 발전이 양국 공동이익에 부합할뿐 아니라 세계 경제성장 촉진과 글로벌 도전 대응에 이롭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영국이 중국과 마주 보고 긍정적 요인을 많이 축적해 두나라의 협력과 호혜의 본질을 드러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용어설명
통일전선공작부(통전부)는 중국 통일전선 전술을 총괄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핵심 조직이다. ‘통일전선’은 공산주의 세력이 혁명단계에서 국내외 주요 세력과 연대해 공동의 적에 맞서는 전술 개념이다. 자력으로 적을 물리치기 어렵거나 시기가 성숙하지 않을 때 우호세력을 확보하고 적을 안에서부터 약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과정에서 공산당이 국민당과 연대한 국공합작이 대표적 사례다.
통일전선 전술은 공산당이 1949년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지만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이후 미·중 전략경쟁이 치열해지자 대외적으로 중국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강조되고 있다. 시 주석 시대의 통일전선 활동은 선전전, 대만·티베트 등 민감한 문제에서 유리한 여론 조성, 정치인이나 언론인 등 유력 인사들과의 친분을 이용한 영향력 행사 등이 두드러진다고 중국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