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에도 임기는 줄어들고 상황은 나빠지고 있다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대의민주제‧법치주의의 위기
‘탄핵’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나…‘혁명’의 효과 기대할 때 아니다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대의민주제‧법치주의의 위기
‘탄핵’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나…‘혁명’의 효과 기대할 때 아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소통광장의 국민청원 및 제안 코너에 “시민의 이름으로, 이번 김경수 경남지사 재판에 관련된 법원 판사 전원의 사퇴를 명령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지난 1월 30일자로 게시됐다. 3일 밤12시까지 ‘참여인원’이 25만 명을 훌쩍 넘었다. ‘동의합니다’는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의 숫자다. 청와대는 30일 동안 추천인의 수가 20만 명을 넘으면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각 부처 장관, 대통령 수석 비서관, 특별보좌관 등)’가 답을 한다고 약속했다. 이미 청와대의 답변 요건은 넘쳐날 만큼 채워졌다. 청와대는 어떤 답변을 할까?
대의민주제‧법치주의의 위기
민주당은 김 지사에 대한 서울 중앙지법의 법정구속을 ‘사법적 적폐 세력의 저항’이라고 규정했다. ‘사법농단 및 적폐청산위원회’를 구성한 민주당은 사법농단에 관여한 법관들 가운데서 탄핵 명단을 추리고 있다며 김 지사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성창호 서울지법 부장판사도 대상이 되는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서울고법 판사 다수가 사법농단에 관련됐다는 분석이 있다는 주장도 했다.
‘적폐탄핵소추 법관’의 명단이라는 것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민변은 성 판사가 3차 명단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을러댔다.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가세했다. 대법원 앞에 수천 명, 중앙지법 앞에 수백 명이 모여 김 지사의 무죄를 주장하며 ‘사법적폐 청산’을 외쳤다.
대의민주제와 권력분립제도, 그리고 법치주의가 폭풍 앞에 세워진 분위기다. 이들 제도는 대한민국을 유지하는 기본 얼개다. 그게 무너지면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 온 대한민국은 끝난다. 그런데 ‘농단’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결기가 정권 안팎에 여전히 넘쳐나는 느낌이다. 어디까지 가고 말 것인가.
대의제는 군중(혹은 민중)의 정치가 아니다. 우민정치 폭민정치의 위험에서 민주정치를 구하기 위해 고안해낸 근대적 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청와대는 군중의 수가 곧 정의일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 체계를 만들었다. ‘20만 명’이 동의를 표하면 그 의견은 청와대에 대해 답변의 의무를 부과하는 힘을 갖는다고 믿게 한 것이다.
또 근대 민주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자 안전판이 권력분립제도라 하겠는데,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유난히 ‘민주주의’를 강조해 오던 세력이 집권하자 오히려 대통령의 권위주의화가 가속되는 양상이다. 입법부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자유우파정당은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못 벗어났다. 반대로 여당은 갈수록 기세가 등등하다. 게다가 사법부의 권위는 청와대와 군중에게 헌납되는 분위기다.
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크게 퇴색했다. 법이 다스리는 게 아니라 대통령과 그 추종자, 그리고 군중이 다스리는 것 같은 구조다.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혁명’을 끝없이 강조함으로써 행동하는 군중, 요구하는 군중, 단죄하는 군중이 법 위에 군림하는 형세를 보이고 있다. 과거엔, 적어도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서는 직접적 공격이 자제되었다. 그렇지만 ‘촛불혁명’이라는 대통령의 명명(命名)으로 권력집단이 된 군중(광장의 군중이든 사이버 공간의 군중이든)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고법이 1심 판결을 지켜내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미 고법 판사들은 집권당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할 경우 이들은 ‘사법농단에 관여한 판사’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격이 되고 만다. 고법뿐만 아니다. 군중들이 대법에 대해서도 엄중히 경고했다. 이 시대에 ‘정권 편에 선 군중’의 힘에 대적할 세력은 없다. 대법원이 ‘사법부 적폐’를 스스로 청산한다고 나선 것이 오히려 군중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긴 꼴이 되어 버린 건 아닌가.
‘탄핵’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나
“지금 당장, 시민들 손으로 끌어내리기 전에, 스스로 법복을 벗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길 충고합니다. 시민들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청원자는 그렇게 명령했다. 그리고 일시에 수많은 ‘동의자’들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몰려들었다. 이건 분명히 위험한 현상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책임지고 지켜가야 할 더불어민주당은 우려를 표하는 대신 오히려 이 분위기에 편승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부와 함께 국정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여당이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을 ‘탄핵 위협’으로 표출하고 나선 것이다. 어느새 ‘탄핵’을 만병통치약쯤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것인가. 아니면 심리적으로 다급해졌다는 뜻인가.
하긴 정권 측으로서도 김 지사에 대한 유죄판결은 예삿일일 수가 없다. 당장 ‘문재인 당선’의 정당성에 문제가 생긴다. 김 지사가 불법 선거운동을 벌인 죄가 확정된다면 문 대통령과 정권의 도덕적 법률적 정당성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는 문 대통령 정부를 떠받치고 있는 진보좌파 전체의 문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문 대통령 또한 두고두고 ‘댓글조작 의혹’에 시달려야 하게 되는 것이다. ‘경인선’ 논란도 다시 불붙을 게 뻔하다. 그래서 더욱 성 판사는 정권 친위세력의 공적이 되고 만 건가.
게다가 최근엔 문 대통령 딸 가족의 석연찮은 해외이주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됐다. 그간의 언론보도만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적이다.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로 하여금 국민에 대해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 또는 해명을 하도록 하기는커녕 되레 이 문제를 제기한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을 7일 검찰에 고발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나섰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곽 의원이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자기권리를 방어할 수 없는 아동의 개인자료를 불법적으로 취득해 공개했다”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동학대이자 범죄행위다. 사찰을 통한 아동의 인권유린에 대해 반드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고발 이유를 밝혔다. 아마도 민주당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듯하다. 잘 모르면서 고발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발은 고발이고, 일단은 국민에게 알아듣도록 설명부터 해줘야 옳다.
정부 여당이 맞닥뜨린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악재가 쏟아지는 형국이다. 이제는 당원이 아니지만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심에서 김 지사와 마찬가지로 법정 구속되었다. 한 때는 당의 차기 유력 대선주자로 기대를 모았던 그가 ‘미투’ 사건으로 구속된 게 부담이 안 될 수가 없다. 손혜원 의원 또한 탈당했다고는 하나 훼손된 당의 이미지가 쉽게 회복되지는 못할 것이다.
‘혁명’의 효과 기대할 때 아니다
청와대로서는 민생 및 경제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게 급선무이지만 현실적으로 뚜렷한 방안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더욱이 문 대통령과 그의 경제참모들은 이른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포기하기는 고사하고 고쳐볼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일자리를 비롯 모든 경제‧사회적 난제들을 예산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는 고집 또한 여전하다. 국민 생활은 어려워지더라도 김정은과의 관계만 좋아지면 정권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상한 신념 때문일까?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대한민국의 이익이 무시되거나 경시된 거래가 이뤄진다면 그 후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계산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정부 여당은 ‘촛불혁명’의 신화에 스스로를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게 설사 혁명이었다고 해도 지금의 경제 사회 안보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기실 그건 ‘혁명’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문 대통령이 잘 알 일이다. 그런 혁명은 역사상 있어 본 적이 없다. 자신의 권력 기반이 ‘혁명’이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국민에게 도움이 안 되는 집착은 빨리 털어낼수록 좋다.
‘혁명’ 효과에 기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청와대 청원 코너를 장식하는 찬사와 지지에 취해 있는 동안에도 임기는 줄어들고 상황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는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일이다. 김정은의 이익은 아주 후순위에 둬도 된다. 지금까지 전쟁을 막아온 것은 북한 독재자들의 선의가 아니라 한‧미동맹을 주축으로 한 우리의 방어력과 국민들의 조국 수호 의지였다. 우선 국민의 안녕과 안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대한민국은 민족국가가 아니라 국민국가임을 잊어선 안 된다. ‘민족’이란 심리적 덫에 걸려 방향을 상실하는 우는 범하지 말 일이다.
징벌로서 혁명정부의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겠다는 생각도 과감히 털어내야 한다. 적폐청산만 하다가 5년 임기를 마칠 심산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20년 집권론’을 말하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인가. 징벌로는 화해와 단합이 이뤄지지 않는다. 분열된 상태로는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이게 상식이다. 경제가 위축되고 민생이 팍팍해지는 데 누가 20년 집권을 허용할까. 꿈도 야무지지.
복철지계(覆轍之戒)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 실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정치 실정을 했다고 여긴다면 그걸 경계 삼겠다는 자세를 왜 갖추지 않는가. 정부의 실적은 말로 채워지는 게 아니다. 허장성세가 민생을 윤택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전혀 새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성공하고 싶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5180여만 명 국민을 ‘가지 않은 길’로 인도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존양식에 부합하는 길을 잘 보수하고 넓히면서 가는 게 진정한 개혁이고 쇄신이다.
그래서 말인데 김 지사를 법정구속시킨 판사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며 위협을 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일엽지추(一葉知秋)라고 하지 않던가. 낙엽 하나에서도 천하의 가을을 감지하듯, 상황과 인심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국민이 안전한 나라에서 서로 아끼며 유복하게 살도록 하는 게 지도자의 정치적 도덕적 책무다. 제발 실험실의 청개구리 신세로는 만들지 말아주시라.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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