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중국 유교학자인 순자의 권학편 첫 머리에는 “학불가이이(學不可以已), 청취지어람(靑取之於藍) 이청어람(而靑於藍), 빙수위지(氷水爲之) 이한어수(而寒於水)”란 글귀가 나온다. 이는 ‘학문은 그쳐서는 안된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로 이루어졌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라는 뜻으로 학문을 이어간다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자성어 ‘청출어람’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프로바둑의 세계를 그린 영화 ‘승부’는 바둑계 전설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 간의 가슴 뭉클하고 불꽃 튀는 이야기를 재현했다.
세계 바둑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조훈현(이병헌 분)은 한국 프로 바둑기사로는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고 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다. 어느 날 바둑 행사에서 조훈현은 이창호(유아인 분)를 만나게 된다. 바둑 신동 이창호를 눈여겨본 조훈현은 얼마 후 그를 제자로 맞게 되고 스승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는 한 지붕 아래 동거 동숙하며 지낸다. 수년이 지난 후, 공식적인 첫 사제 간의 대국에서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패배한다. 기세를 탄 이창호는 연이어 스승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긴다.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조훈현은 담배까지 끊으며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되살려 다시 정상에 올라가겠다고 작심한다.
영화는 바둑을 통해 삶을 이야기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를 꼽으라면 단연 이창호와 조훈현이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으로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바둑은 물론 인생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둘은 기풍도 달라 조훈현 9단은 공격에 강해 전투의 신이라 불렸고, 이창호 9단은 방어에 강해 계산의 신으로 통했다. 영화는 바둑을 통해 프로들의 냉정한 승부 세계를 다룬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략 게임 중 하나인 바둑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야기 한다. 정석, 포석, 갈라치기, 묘수, 승부수, 꼼수, 미생, 복기, 사활, 호구 등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수많은 단어가 바둑에서 유래된 것이다. 더욱이 바둑은 상대가 없으면 자신의 승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한 철학적인 요소가 많은 게임이다. 영화는 단순한 바둑이 재미에 지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게 하는 하나의 삶의 방식임을 전하다.
청출어람 청어람의 의미를 되새긴다.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청출어람은 이들의 관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조훈현은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고에와 후지사와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 최고의 프로 바둑기사가 됐다. 더욱이 바둑의 도와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시킨 스승 덕분에 최고의 프로기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의 밑에서 이창호는 스승과는 다른 방식의 자신만의 게임 전략을 만들어낸다. 공격적으로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조훈현 스승과는 달리, 계산된 방어를 통해 반집으로 승리하는 자신만의 기풍을 만들며 스승이 만들어 놓은 최고의 자리를 뒤엎는다. 제자에게 지고 싶지 않은 치졸하고 지질한 스승과 스승을 뛰어넘는다는 죄책감, 하지만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 영화는 인간적인 이창호의 모습을 보여주며 서로 성장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사제 간의 모습을 통해 가슴 진한 감동을 전한다.
배우들의 열연이 재미와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유아인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4년 동안 창고영화로 남을 뻔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공개된 영화는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작품 중 가장 재미있는 작품중 하나로 평가된다.
100%의 싱크율을 자랑하는 이병헌의 연기는 물론 영화가 시작한 뒤, 30분 만에 등장한 유아인은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전작에서 보여준 이미지를 빼고 이창호를 완벽하게 재연하는 등 호연을 펼쳐 보인다. 이창호의 아역을 맡은 김강훈 배우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몰입감을 더한다. 뿐만 아니라 남기철, 천승필까지 바둑판 위에서 펼쳐지는 수싸움과 예를 갖추며 진행되는 바둑게임 등으로 바둑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이라도 바둑이라는 스포츠 정신과 철학이 무엇인지를 음미할 수 있도록 했다.
AI(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의 지능은 위협받고 있다. 알파고는 74전 73승 1패를 거두며 인간의 지능을 능가했다. 그러나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인간의 감정 영역을 넘볼 수는 없다. 윗세대로부터의 지혜와 경험, 우정과 사랑, 존중과 예의를 통해 새로운 세대는 인간적인 교감과 정서를 배운다. 영화 ‘승부’는 기존 세대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해야 새로운 세대가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두 사제지간의 삶을 통해 전한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