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한 다음 해인 1393년 6월 16일에 나오는 실록의 기사에는 섬라곡국이라는 낯선 나라가 등장한다. 이 나라는 지금의 태국으로 시기상으로 보면 아유타야 왕조시대로 보인다. 서기 1350년에 세워진 아유타야 왕조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이 건국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물과 토인을 바쳤는데 태조 이성계는 두 명의 토인으로 하여금 궁궐을 지키게 했다. 조선의 법궁이자 정궁인 경복궁은 1395년 11월에야 완성되었기 때문에 섬라곡국에서 온 두 명의 토인이 지킨 궁궐은 아마도 경복궁을 짓기 이전에 임시로 머물렀던 한양부의 객사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궁궐을 지키는 일을 숙위(宿衛)라고 부르는데 종종 외국인들에게 이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중국의 경우 주변 국가에서 보낸 인질 아닌 인질들에게 궁궐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라의 왕자 김인문으로 당나라로 가서 황제를 숙위하면서 동시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외교 교섭을 맡았다. 생각해보면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궁궐을 지키는 임무일 것이다. 문만 서서 지키면 되기도 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인맥과 안면을 이용해서 궁궐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는 효과를 발휘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항복하거나 투항한 여진족이나 왜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궁궐을 지키게 하는 임무를 주었다. 따라서 섬라곡국에서 바친 토인들에게도 같은 임무를 준 것이 어색하거나 특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궁궐 앞을 지나가는 백성들이나 혹은 입궐하는 관리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섬라곡국 사신들을 잘 대접해서 그해 12월에 돌려보내면서 회례사로 예빈 소경 배후를 딸려 보낸다. 아마, 섬라곡국과의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다음 해인 1394년에 7월에 다시 돌아온다. 섬라곡국으로 가기 위해 일본에 들렸다가 왜구들의 습격으로 예물들을 모두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칼과 갑옷, 그리고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 모를 흑인 두 명을 바쳤다. 소식을 들은
태조는 안타까워하면서 사신인 장사도와 함께 온 진언상에게 관직을 제수해서 위로해준다. 그리고 섬라곡국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한해를 건너뛰고 1396년에 다시 등장한다. 상당히 안타까운 기록과 함께 나오는데 나주 앞바다에서 왜구들에게 붙잡히고 만 것이다. 조선에서 회례사로 보낸 예빈 소경 배후는 물론이고 섬라곡국에서 회례사로 보낸 임득장도 모두 잡혀서 죽고 말았다. 통사로 간 이자영만 붙잡혀서 끌려갔다가 서기 1396년 7월에 겨우 귀국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음 해 4월, 죽은 걸로 기록된 섬라곡국의 사신 임득장을 비롯한 6명이 도망쳐서 조선으로 오는데 성공했다. 태조 이성계는 간신히 살아 돌아온 그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옷을 한 벌씩 하사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열린 조회에 참석하도록 한다. 그런데 그들이 선 자리 근처에 항복한 왜구 두목 나가온이 서 있었다. 그걸 본 임득장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남겨진 기록이 없다. 참고로 항복한 왜구 나가온은 임온이라는 조선 이름을 받고 종 4품의 무관직인 선략장군에 임명된다. 섬라곡국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아마 조선에서 마련해준 배를 가지고 섬라곡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왜구의 습격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다시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조선 역시 왜구의 습격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있는 섬라곡국과 교류를 맺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외교 관계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10여년 후에 서기 1406년 8월에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섬라곡국에서 온 첫 번째 사절인 장사도와 함께 온 진언상이 이번에는 조와국의 사신으로 조선에 온 것이다. 조와국은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있던 마자파힛 제국으로 보인다. 진언상이라는 이름을 보면 중국에서 건너간 화교 상인으로 추측되는데 조선에 온 경험 때문인지 다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의 습격을 받았다. 21명이 죽고 60명이 끌려가서 남은 생존자는 40명에 불과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약탈당했다는 사실을 문서로 확인해줄 것을 요청한다. 조선에서는 부탁을 들어주고 배도 한 척 내준다. 진언상은 돌아가는 길에 배가 파손되어서 일본으로 표류한다. 다행히 이번에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고, 6년 후인 서기 1412년에 일본에 가는 길에 손자인 실숭을 조선에 보내서 감사함을 표시한다. 하지만 조와국과의 교류 역시 왜구들 때문에 막히고 만다. 조선왕조실록의 초기 기록을 보면 생각보다 많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왜구들의 방해와 먼 국가와의 교류에서 얻는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몇 차례의 왕래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정명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