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中 배제 겨냥한 IRA 가결…국내 車·배터리사 미 중심 공급망 재편 '과제'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과시키면서 국내 자동차·배터리 기업들의 긴장감이 어느 때 보다 커지고 있다. 당장 내년부터 북미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고 배터리 원자재도 중국 비중을 크게 낮춰야만 보조금 지급 혹은 수혜 대상이 될 수 있어서다.
현지 공장을 두고 있는 LG, SK 등 배터리사들은 중국 의존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당장 새 원자재 공급망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지 않는 현대차·기아는 현지 생산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 생산 계획 일정을 재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9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원은 7일(현지시간) 4300억 달러(약 561조원) 규모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40%를 줄이기 위해 기후변화 대응에 3690억 달러(479조원)를 투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목할 것은 친환경차 육성을 위해 제조사별 보조금 상한선을 폐지하는 대신 미국산 원자재 비중이 높은 기업에만 보조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업체별로 연간 20만대까지 제한했던 전기차,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에 대한 보조금 한도는 폐지됐지만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채굴·제련한 광물 비중을 40%로 늘려야 한다는 조건이 새롭게 붙었다. 2023년을 시작으로 매년 10%p씩 올려 2027년에는 이 비중이 80%로 확대된다.
또한 배터리 등 주요 부품도 50% 이상을 북미에서 생산한 제품을 장착해야만 보조금 지급 대상이 된다. 2027년에는 80%, 2029년에는 100%까지 상향된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대당 보조금 7500달러(980만원)을 세액공제 형태로 지원하겠다는 게 법안의 핵심이다. 원자재·부품 수급에 있어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들만 한정하고 있어 사실상 중국, 러시아 등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미국의 강력한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전략에 국내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미국 투자 확대 뿐 아니라 투자 속도도 앞당겨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 미국 현지에 생산공장을 두고 있는 국내 배터리사들은 CATL 등 중국 기업 배제로 성장 기회가 확대되는 등 대체적으로 긍정적 효과가 높아질 것으로 진단한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자국 보조금 정책에 힘입어 기형적으로 급성장한 측면이 있다"면서 "미국의 전기차 정책으로 산업 육성이 한층 빨라질 것으로 국내 배터리기업들의 생산·판매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다만 흑연, 리튬 등 중국산 비중이 높은 원재료 공급을 다각화하는 문제는 단기간 내 이뤄지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배터리 소재로 쓰이는 수산화리튬의 중국산 비중만 하더라도 80%를 넘어선다.
미국 전기차 공장이 없는 현대차·기아도 시장 장악력 확대를 위해 현지 투자 일정을 앞당기는 방안을 고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제너럴모터스(GM), 토요타, 폭스바겐 등 주요 자동차업체들이 소속된 자동차혁신연합(AAI)은 이번 법안 통과를 두고 전기차 목표달성이 어려워질 것이라며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물밑으로는 막대한 보조금 지원 혜택을 얻기 위해 공급망 다각화, 현지 투자 확대에 발 빠르게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글로벌 업체들이 보조금 혜택을 휩쓸게 되면 보조금 지원을 받지 못한 현대차·기아는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사라져 자칫 현지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
현대차는 오는 11월 GV70 전기차를, 기아는 내년 EV9를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최근엔 2025년 상반기까지 조지아주에 연산 30만대의 전기차 공장을 짓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당장 3년 뒤 글로벌 시장에서 400여종의 전기차가 쏟아질 것이라는 기관들의 전망을 감안하면 속도를 더 내야하는 상황이다.
GM, 테슬라 등 주요 글로벌 업체들이 보조금 혜택을 무기로 현지 시장을 장악할 때까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 가서 아무리 디자인·품질 경쟁력이 좋은 전기차를 내놓는다고 한들 빼앗긴 점유율을 되찾기까지 또다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다.
다만 전기차 전환은 고용 문제와 직결된 사안인만큼 노조의 협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미국 시장 도태는 곧 글로벌 시장 경쟁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미국 투자 계획에 노사가 하루 빨리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공급망 주도권을 잡기 위해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국내 업체들은 현지 생산 확대와 새 공급망 개척이라는 주요 과제를 안게 됐다"면서 "위기가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노사의 전략적 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