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탈리스트’
예술가의 삶을 다룬 영화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작품에는 그들의 삶의 일부분은 물론 경험과 감정,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창조해낸 작품을 통해 예술가들의 지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고 자신의 결핍과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라즐로 토트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라즐로 토트(에드리언 브로디 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쫓기듯 홀로 미국으로 건너온다. 고국에서는 알아주는 유능한 건축가였지만 이민자로서 그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겁다. 어느 날, 저명한 사업가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 분)의 눈에 띄어, 그의 어머니를 기리는 복합문화센터를 설계할 기회를 얻는다. 또한 그의 후원으로 라즐로의 아내(펠리시티 존스 분)와 조카도 무사히 미국으로 오게 된다. 하지만 라즐로는 점점 자신의 건축 철학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에게는 건축은 단순한 건물이 아닌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을 새기는 공간인 반면, 해리슨은 건축을 예술이 아닌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유지하는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라즐로는 예술적 신념에 따라 건물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건축가의 삶을 통해 아름다움의 본질을 역설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예술의 최고봉은 문학이며 그 다음으로 회화, 음악, 조각, 건축이 있다고 말했다. 건축은 단순히 짓는 행위만이 아닌 인문학적 지식과 사람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도 알아야 하고 물리학의 원리를 적용해 안전하고 견고한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심미적인 감각은 필수적이다. 건축가에게 철학이 없다면 그 건물은 영혼없는 건물이다. 라즐로가 만든 건축물은 강제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하부 구조물과 그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직육면체 기둥으로 돼 있다. 해가 이동하면서 중앙 회당에는 시간별로 빛의 십자가가 드리운다. 높이 세운 기둥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요, 빛의 십자가는 구원을 의미한다. 전쟁으로 얻은 상처와 트라우마, 결핍과 고난으로 힘겨웠던 라즐로는 자신만의 철학과 한 인간의 삶, 시대를 반영한 건축물로 승화시킨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건축물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예술의 정수, 건축가로 대변된다. 영화는 건축가에게 건축물은 자신의 철학과 아름다움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힘주어 말한다.
건축가와 자본가를 대비시켜 자본주의의 민낯을 들춘다. 역사와 예술을 자랑하는 유럽과 이민의 역사로 만들어진 신생국인 미국을 영화는 건축가와 자본가로 나눈다. 예술은 자본의 힘으로 생존을 보장받고 자본은 예술을 통해 공허함을 극복하려 한다. 라즐로로 의인화 된 예술은 고고하고 순수하지만 여리고 나약하다. 반면 해리슨으로 형상화 된 자본은 당당하고 거침없으나 변덕스럽고 잔혹하다. 미국은 이민자에 의해 세워진 나라지만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는 차갑기만 하다. 천재성을 알아 챈 해리슨은 라즐로의 예술성보다 재산의 가치 상승을 위해 설계를 제안한다. 그러나 라즐로는 개인과 민족의 투쟁으로 쌓아 올린 브루탈리즘 사조의 복합문화센터를 예술혼을 불태우며 세계적인 건축물로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불평등과 노동력 착취,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라즐로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 민낯을 드러낸다.
새로운 시도로 전혀 다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브레디 코베 감독은 가상의 천재 건축가 라즐로를 탄생시켰다. 1988년생 37세의 젊은 감독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비스타비전 카메라와 70mm필름으로 촬영했다. 제작환경이 모두 디지털로 바뀐 21세기인데 아직도 필름촬영 문화가 남아있는 헝가리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여기에 배우들의 대사는 AI음성기술로 교정하여 완벽하게 헝가리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에서 가장 새롭고 신선한 요소는 바로 인터미션이다. 무대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15분 간의 휴식 시간을 영화에 적용시킨 것이다. 상영 시간 215분에 달하는 영화에서 인터미션은 단지 주어진 휴식 시간이 아닌, 영화를 더 몰입하게 만드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으로 시도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제81회 베니스영화제 감독상과 제8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또한 올해 3월에 있을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10개 부문이 노미네이트 됐다.
우리는 예술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높은 가격을 지불한다. 그러나 예술품이 자본가에게 투자의 수단이 되면서 예술의 본질을 잃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설계자의 철학을 통해 예술의 본질이 자본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