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3화 백일기도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백일기도 중이라던 한종탁이 아침부터 취한 목소리로 이철백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철백은 블랙&화이트에서 방선희와 늦잠을 자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방선희가 침대 위에서 눈짓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이철백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하겠다며 한종탁에게 양해를 구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한종탁이라는 친군데, 정신병원에 입원한 김석규와 나, 이렇게 셋이 고등학교 때부터 문청 삼총사였어.”
“그런데 나는 어찌 한 번도 못 봤을까?”
“단주 중이었거든. 그 친구 술 안마시면 사람도 안 만나.”
“그런데 왜 전화했대?”
“어제 금요일이라고 밤 새워 술 마셨나봐.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에게 맞아 죽는다고 해장술 한잔 하자 그러네.”
“그래? 그럼 딴 데 갈 거 없이 여기로 오라고 해. 내가 술국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그래도 되겠어?”
이철백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한종탁에게 전화를 걸어 블랙&화이트의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아울러 방선희의 존재에 대해서도 미리 귀띔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선희는 얼른 일어나 세안만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다음 무와 대파를 듬뿍 넣은 우럭 매운탕을 시원하게 끓여냈다.
“살다보니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네. 제수씨, 우리 철백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이 놈 이거, 참 불쌍한 놈입니다. 자비 베푼다 치고, 적선한다 치고 잘 좀 거두어주세요.”
한종탁이 방선희의 미모에 놀랐는지 둘을 희번덕거리는 시선으로 훑어보다가 술기운 섞어 차지게 말했다. 이철백은 능글맞게 구는 한종탁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근데 어쩐 일이냐. 두 달 반이나 단주하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 술을 마셨대?”
“단주는 무슨.”
“보름 전에 전화했을 때 백일기도 중이라며? 그게 너 잠수 탄다 하고선 두 달쯤 지나서였는데.”
“말이 백일기도지 차라리 백일음주에 가까웠노라.”
한종탁이 불콰한 얼굴에 소주 한 잔을 부어넣으며 지난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기도 중입니다.”
사무실 회식자리에서 여직원 하나가 술을 따르려하자 한종탁이 제지하며 말했다.
“무슨 기도예요, 팀장님?”
여직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한종탁은 백일기도라고 짧게 대답했다.
“백일기도요?”
팀원들의 시선이 한종탁에게 쏠렸다. 한종탁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종교와 관련해서요?”
여직원이 소주병을 내려놓고는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돈 벌려면 종교만한 사업이 없다면서 개척교회나 암자 하나 알아봐야겠다며 평상시 늘어놓던 한종탁의 농담에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아뇨. 친구가 퇴원하려면 이제 백일 남았어요.”
“친구분 퇴원하는 것과 팀장님 술 드시는 게 무슨 상관예요?”
“내 술친구이자 문학친구인 절친 하나가 술 때문에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거든요. 친구의 고통에 동참하려고요.”
팀원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염 부장은 시니컬하게 몸소 소주병을 들어 한종탁에게 재차 술을 권했다. 염 부장은 한종탁의 단주란 게 폭음에 기인한 마누라의 바가지 후에 따라붙는 혹 같은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괜찮아, 마셔. 내가 제수씨께 전화해 줄게.”
염 부장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하게도 결제(結制)를 풀어줄 수 있다는 듯 오만방자해 보였다. 한종탁은 그 말본새가 자신뿐 아니라 아내까지도 아랫사람 대하듯 얕잡아본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됐습니다, 됐고요!”
한종탁이 대뜸 정색을 하고 도발적인 기색으로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자 염부장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면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아마 염 부장은 한종탁이 말은 그렇게 해도 술을 주면 못 이기는 척하며 받을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뭐라고! 앞으로 술 먹으면 넌 사람새끼도 아냐!”
염 부장이 단단히 삐쳤는지 힘껏 고함을 질렀다. 십년쯤 아래인 후배에게 호의적으로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가차 없이 거절당한 게, 그것도 자식뻘 되는 부하직원들 앞에서 망신스러운 꼴을 당한 게 울화통 터진다는 표정이었다.
“말씀이 좀 지나친 거 아닙니까!”
한종탁도 빈정 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부장이라지만 나이 차이가 일곱 살밖에 나지도 않는데 정도껏 해야지, 술 먹으면 사람새끼도 아니라니. 그냥 ‘앞으로 술 먹지 마라’ 정도로 해두면 되지. 한종탁의 반발에 팀원들이 모조리 입을 꾹 닫았고 회식자리의 좋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내가 말이 좀 심했군. 미안해, 한 팀장.”
염 부장이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재빨리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서둘러 사과하며 진화에 나섰다. 멸치처럼 가느다란 몸매에 가늘게 쭉 찢어진 눈매는 한눈에도 염량 빠르게 보였지만 염 부장은 실제로도 염량이 빨랐다. 한종탁은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염 부장의 사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분위기를 추스르고 이내 특유의 친화력으로 삼겹살을 굽고 술꾼들을 보조해주는 일로 회식자리를 주도했다.
한종탁이 백일기도를 하게 된 것은 지난 사월 말 김석규의 입원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비보에 몸도 마음도 축 늘어진 한종탁은 그날 퇴근하면서 염 부장과 가볍게 한잔하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그만 이차까지 가게 되었다. 염 부장은 술집을 나서자마자 취한다며 멸치처럼 재빠르게 귀가했지만 한종탁은 그리할 수가 없었다. 애초 일차에서 끝내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이미 발동이 걸려버린 후였다. 염 부장과 헤어질 때만 해도 자정이 가까웠는데 들개처럼 쏘다니고 나니 어느덧 새벽 네 시였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