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폭등 미국, 금리 인상 폭 늘려
정부 금리 0.5%p↑ ‘빅 스텝’ 가능성
KDI “미국과 다른 국내 상황 고려해야”
미국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인상을 매우 공격적으로 펼치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금리인상 속도와 폭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무기로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다른 나라들로 수출하면서 ‘역대급’ 원·달러 환율을 기록하는 등 우리나라도 금리 인상 압박이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제롬 파월 의장은 최근 “물가상승률이 내려갔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금리를 인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며 “광범위하게 인식된 중립 금리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면 그 일을 망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파월 의장이 말한 중립 금리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압력이 모두 없는 안정된 상태에서의 금리 수준으로 통상 2.5% 정도를 의미한다. 파월 의장의 이번 발언은 이번 달에 이어 내달에도 기준금리를 0.5%p씩 올리는 ‘빅 스텝(big step)’을 단행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빅 스텝을 넘어 ‘자이언트 스텝(giant step)’ 가능성도 거론된다. 자이언트 스텝은 기준금리를 0.75%p씩 인상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자이언트 스텝 가능성은 지난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화두에 오르기 시작했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물가 때문에 연준이 더욱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부터다.
미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이언트 스텝 가능성을 크게 평가한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페드워치(FedWatch)에 따르면 시장 참여자들의 97.9%는 연준이 6월 FOMC(미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0.75%p 인상할 것으로 예상했다.
연준 내에서도 자이언트 스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로레타 메스터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하반기에도 물가 상승률이 내려가지 않으면 우리는 속도를 더 올려야 할지 모른다”며 자이언트 스텝 가능성을 시사했다.
존 윌리엄스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FOMC 부의장) 또한 연방은행 주최 행사 연설에서 “경제 상황에 따라 연준이 금리를 그 수준(0.50%p) 이상으로 올릴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파월 의장은 자이언트 스텝에 부정적인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 8%대인 미국 소비자물가 추이에 따라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난 5일 FOMC회의에서 파월 의장은 자이언트 스텝은 논의를 안 한다고 했으나 상무부에서 발표하는 소비지출지수가 악화할 경우 0.50%p 이상 올릴 수 있다”면서 “연준 내에서도 자이언트 스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진 만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현재 고강도의 금리 인상을 통해 사실상 인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있다. 달러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려 달러의 가치를 높이면 해외 투자 자본은 달러 매입을 늘리게 된다. 이렇게 해외로 달러가 빠져나가면서 미국 내 통화량은 줄고, 물가는 낮아지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수출 정책은 상대국의 화폐 가치 하락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원·달러 환율이 1300원 가까이 오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우리 정부도 적절한 대응, 즉 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6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만나 금리 인상과 물가 등 경제 현안을 논의했다. 추 부총리는 이날 회의에서 금리 인상 관련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고 전했으나 이 총재는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 “향후 빅 스텝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4월 상황까지 봤을 때는 그런 고려를 할 필요는 없는 상황인데, 앞으로 물가가 얼마나 더 올라갈지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데이터를 보면서 판단해야 한다”며 “5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보고 7∼8월 경제 상황, 물가 변화 등을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는 26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에서는 기준금리 인상(0.25%p)이 유력하다. 지난달에 이어 연이은 상승이다. 다만 내수 경직 등을 우려해 이 총재가 언급한 빅 스텝 수준의 금리 인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대신 오는 7월과 8월에도 금리를 높이는 등 당분간 연속 상승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미국은 높은 물가 상승세와 견고한 경기회복세에 따라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있다”며 “물가상승률이 더 높고 경기회복세가 더 강한 미국과 유사한 정도의 가파른 금리 인상이 우리 경제에 요구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 실장은 “한국 경제 상황이 물가가 지금보다 더 급증하고 경기가 과열되는 우려가 있다면 빅 스텝도 가능하지만 (당장) 미국을 따라 올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