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아마도 시위가 목적일 것이다. 여기서 시위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공공연하게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다른 사람 혹은 대상에게 영향을 주고자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무력을 사용하여 영향을 주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무력시위라고 할 수 있다. 관련 전문가가 아닌 까닭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무력시위는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아 작용과 반작용이 함께 일어난다는 점이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의 독립을 배후에서 지원하자, 이에 스페인이 반발하면서 양국 간의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때 미국은 스페인 함대를 분산시킨다는 명목으로 필리핀에 함대를 파견했다. 당시 스페인은 카리브해에서는 쿠바를,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을 주요 식민지로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필리핀이 공격을 받을 경우 스페인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함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 해군이 필리핀에 듀이 함대를 파견하였던 것은 그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듀이 함대의 필리핀 공격은 순조롭게 이뤄졌고, 결국 미서전쟁 이후에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이 돌발 변수로 떠올랐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타이완을 강제로 병합했다. 일본은 타이완을 차지하면서 동남아시아, 특히 필리핀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다. 특히 미국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일본이 미국과 필리핀 간의 연결을 차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미서전쟁 중 일본 해군은 필리핀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필리핀에 함대를 파견했고, 심지어 일본군 장교가 미국과 전쟁 중이던 스페인 진영을 방문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러한 일본 해군의 행동과 소문은 미국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만일 일본이 스페인과 동맹을 맺을 경우 오히려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에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양면전쟁의 위협이었다.
당시 미국의 주력함대는 대서양 함대였다. 대서양 함대가 태평양까지 오려면 남미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와야 했다. 사실상 지구를 거의 반 바퀴(26,958km) 도는 셈이었고, 기간만 3개월 이상 소요되었다. 반면 일본 해군이 일본에서 출발해 필리핀 마닐라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10여 일이 채 걸리지 않았고, 미 서부 주요 해안 도시까지는 2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미 서부 해안과 필리핀은 대서양 함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의 유권자들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미국 정부의 미온적 조치에 반발하며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기름을 붓는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1902년 영일동맹이었다.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체결했을 때 가장 긴장한 국가는 우리가 한국사 수업시간에 배운 것처럼 러시아라고 할 수 있지만, 러시아만큼 위기의식을 가진 국가가 미국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두고 영국과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 영국의 동맹인 일본은 미국에 선전포고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영국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무력시위는 계속됐다. 미국이 하와이를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은 자국민 보호와 협정 이행 등을 이유로 함대를 파견했고, 일본 해군은 미서전쟁 이후에도 필리핀 인근 해역에서 원정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했다. 결국 1908년 미 해군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까지 순항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이른바 ‘백색함대’의 태평양 항로 훈련이었다. 1908년 7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미 백색함대는 1908년 10월 18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백색함대의 훈련은 태평양의 주도권이 미국에 있다는 분명한 표시였다.
미 백색함대의 일본 방문은 당시 많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이는 한국 언론도 마찬가지여서 ‘황성신문’에서는 미 함대가 출발한 직후 ‘미국 동양함대의 증가’ 등을 보도하며 미국이 필리핀 등에 주둔하는 함대를 증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대한매일신보’ 등에서는 ‘미국 함대의 이동’ 소식을 전하면서, 이것이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너머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9년 일본 해군은 기존 필리핀 인근을 중심으로 실시하던 순항 훈련을 미 서부지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일본 함대는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까지 도착한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는 훈련을 실시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에서는 반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주 정부에서는 반일 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양국 간의 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이 위기는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이른바 ‘신사협정’을 체결하면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협정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 내면에 쌍방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고, 이러한 불신은 전쟁에 대한 대비로 이어졌다. 일본은 '제국국방방침'에서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하여 전쟁계획을 세웠고, 미국 역시 ‘오렌지 계획’이라는 작전명의 대일본 전쟁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미국과 일본의 전쟁계획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군비 경쟁 등으로 절정에 달하였고, 결국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무력시위가 가져온 반동이었다.
흔히 상대의 선택지가 여럿 있을 경우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마땅히 모를 경우가 많다. 상대의 선택지에 휘둘려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면 시기를 놓치거나, 적절한 준비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군사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활은 그 시위가 당겨지는 순간 이미 그 위력을 상실하는 것이며,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그 위력이 최대한 발휘된다.” 칼을 뽑고 시위를 당겨버린 미국과 일본은 더 많은 활과 칼이 필요했고, 이미 날아간 화살을 멈출 수 없었다. 상대가 감히 도발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것, 그것이 칼집 속에서도 푸른 날이 빛나는 칼이 가진 힘이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