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편집자 주> 명작은 시대가 흘러도 명작입니다. 대중과 첫 만남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한 작품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작품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때론 세세하게 때론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조엘(짐 캐리 분)은 어느 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의 모습에 당황해 한다. 그러다가 클레멘타인이 라쿠나사라는 곳에서 기억을 지웠음을 알게된다. 화가 난 조엘은 자신도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라쿠나사의 스탠(마크 러팔로 분)은 메리(커스틴 던스트 분) 등과 함께 조엘의 집에서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착수하지만, 이내 문제가 발생한다. 조엘이 점점 가슴속에 각인된 추억을 지우기 싫어하면서 ‘지우는 작업’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하워드(톰 윌킨스 분)까지 가세해 기억을 지우려 한다. 여기서 메리와 하워드의 관계가 드러나고, 메리의 선택은 조엘과 클레멘타인 모두에게 혼란을 준다. 지워진 사랑의 기억은 다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줄거리)
홍종선 : 짐 캐리 영화 중 ‘이터널 션샤인’을 가장 좋아해요. 보통 희극 연기는 정극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잘한다고 말을 하는데, 다시 한번 입증하는 짐 캐리의 명연기. 과거 영화를 보기 전에는 몰입될까 생각했는데, ‘코미디 연기의 대가’인 건 생각나지도 않았고, 여섯 살 꼬마로 돌아갔을 때 코믹연기 하는데도 웃기지 않더라.
유명준 : 어느 때는 브레드피트 느낌도 나던데요.
홍종선 : 누워 있을 때는 심지어 키아누 리브스 느낌도.
유명준 : 케이트 윈슬렛은 연기가 새삼 다시 보였어요.
류지윤 : 케이트 윈슬렛은 ‘타이타닉’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고착되어 있었어죠. 그래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클레멘타인이 보여준 감정 기복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나 싶을 정도였죠.
홍종선 : 난 케이트 윈슬렛이 뭐랄까 영구 오페라 같은 느낌 때문에 ‘타이타닉’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터널 션샤인’ 보면서 ‘아 이 배우가 이렇게 사실적 연기를 하는구나’ ‘클래식하게 연기하지만은 않는구나’ 싶어서 좋아졌어요. 그래서 그 뒤 2008년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때 더 좋았고. 모든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어요.
유명준 : 영화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내니까,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게 만들어 준 거 같기도 해요.
홍종선 : 마크 바팔로도 나름 훈훈한 편. 못 생겨도 마음 따뜻한 남자로 새로워 보였고.
류지윤 : 커스틴 던스트도 좋았어요.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주연 배우들에게만 몰입해서 봤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까 커스틴 던스트가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됐어요.
홍종선 : 저도 이번에 커스틴 던스트에 감정이입하고 봤어요. 그런데 어떤 면에서 불쌍했어요?
류지윤 : 메리 주변에는 남자들이 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싶었어요. 조엘 같은 남자는 없고요. 영화에서 클레멘타인 다시 시작하는 좋은 예였다면, 메리는 다시 시작하는 안 좋은 예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워드나 패트릭이나 스탠은 다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에서 일하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깊게 사랑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홍종선 : 그렇겠네요. 큰 역할로 보이지 않지만 메리가 이야기를 풀어나가죠. 스토리상 변곡점을 제공해요. 그래서 감정이입이 됐다는 건 아니고, ‘사랑은 원형을 반복한다’는 슬픈 역사를 쓰고 있는 메리라 마음이 갔어요. 어쩜 세상에 기억을 지웠는데, 또 같은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류지윤 :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유명준 : 두 번째 보니, 메리가 중간에 너무 임팩트가 강해서 중간에 주연 배우 두 명이 잠시 사라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죠. 처음 봤을 때는 ‘쟤 뭐지’ ‘이 상황 뭐지’ 했죠.
홍종선 : 그나마 조엘은 ‘몬탁 해변으로 오라’는 클레멘타인의 말이 기억 잔상으로 남아서 새로 시작했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은 자기 자신이 예쁘고 괜찮은 사람이고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인 걸 확인하고 싶어서 예의 다시금 착해 보이는 한 남자(조엘)에게 다시 말을 걸면서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지만, 메리는 그 모든 걸 차단해 놓았는데도, 다시 같은 사랑을. 그런 메리이기에 라쿠나사 시스템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유명준 : 영화를 보면 이성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이성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뇌에서 기억을 지워도 차곡차곡 쌓여있는 잔상들이 또 결합하고 그게 육체를 움직이고, 그게 다시 이성을 만들어내는. 메리의 키스도, 클레멘타인이 말을 거는 행동도 그런 쌓여있는 잔상들의 결합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거 같았어요. 기억도 쌓여있을 장소가 필요하잖아요.
홍종선 : 육체가 이성을 지배한다. 매우 유물론적 관점이네요. 일면 매우 동의합니다. ‘몸이 기억한다’. 몸이 기억하는 건 뇌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깊은 거 같아요. 칫솔질처럼.
유명준 :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제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전 영화를 디테일보다는 흐름 전체를 보는 스타일인데, 중간에 기억이 지워지고 피하고 맞춰지는 과정들이 다소 지루하기도 했죠. ‘몬탁 해변으로 와라’ 여기서부터 재미를 느꼈으니.
홍종선 : 아, 지루할 수 있겠네. 공드리 영화는 장면 장면의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가 시작된 발상 지점이 중요하지 흐름 자체는 평범하니까. 반복을 보이기도 하고. ‘비카인드 리와이드’가 그러하듯.
유명준 : 그래서 영화 앞의 1시간 30여분이 뒤의 17분을 위한 거 같기도 하죠.
홍종선 : 엉뚱한 이야긴데, 커스틴 던스트가 이때 매우 예뻤던 리즈 시절이라서 임팩트가 강한 거 같아요. 조연인데, 주연으로 격상하는. 2004년에 ‘윔블던’이라는 영화를 찍었죠. 세계 1등의 테니스 선수인데 거의 무명인 남자 테니스 선수를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 짐 캐리가 누워 있는 침대에서 마크 버팔로와 방방 뛰고 춤추고 아무렇게 너부러져 있는 그 분위기와 비슷한 이미지로 나오는데 너무 예쁘거든요. 배우의 리즈 시절은 가장 예뻤던 때, 가장 작품 많이 한 때라기보다는 가장 에너지가 좋은 때가 아닐까 해요. 그래서 예뻐 보이고 그래서 대중이 좋아하고, 그래서 작품 콜이 많이 들어오고.
류지윤 : 한번 봐야겠네요. 사랑 이야기는 봐도봐도 지루하지 않아요.
홍종선 : 엉뚱한 질문인데, 만약 라쿠나사 같은 회사가 있다면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아니 지울래요?
류지윤 : 전 안 지울래요. 어차피 또 똑같은 행동 하고 있을 운명인데요.
유명준 : 현실적으로 말하면 가끔 어제 일도 기억이 안나서. 사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있지만, 지우긴 싶죠. 기억이라는 것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엮이고 엮여서 있는데.
홍종선 : 저도 지우지 않을래요. 메리는 그 기억을 지웠으면, 자기 발등을 찍고 싶은 그 일을 다시 하지 않았을 거예요. 실수도 실패도 나의 일부이고,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조엘이 클레멘타인 손 붙들고 여기저기 도망 다닐 수 있는거죠. 무엇에 관한 기억 전체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 가지가 하도 여기저기 뻗어 있으니.
류지윤 : 너무 흥미롭네요. 기억을 지운다는 설정 하나가 이렇게 유기적으로 엮이니. 비슷한 설정은 아닌데, 일본 드라마에 ‘주마등 주식회사’라고 있어요. 죽기 전에 자기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고 하잖아요. 그 기억을 보관해서 다시 볼 수 있다는 설정이었는데, 기억에 관련해 재미있더라고요.
유명준 : 만약 모든 것을 기억하고, 또 그 기억이 완벽하다면, 아마 세상 살아가기 힘들죠. 가끔은 자신이 좋았던 기억은 과장하고, 싫었던 기억은 회피하고 있기에 살아가죠. 영화 속 두 사람이 나중에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가 그냥 인정하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봤어요. 그리고 두 사람이 테이프를 통해 말했던 기억도 정말 제대로된 기억이고 평가일까 싶기도 했고요.
류지윤 :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바람이 분다’ 가사입니다.
홍종선 : 주마등 이야기 들으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플 라이프’가 생각났어요. 천국으로 가기 전에 망자는 중간역인 림보로 가죠. 그곳에 7일간 머물며 인생에서 제일 소중했던 기억 하나를 고르죠. 그 추억을 림보 직원들이 영화로 재현해 선물해요. ‘이터널 선샤인’이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원더플 라이프’는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이 무엇인지, 과연 있는지 물어보죠.
<‘이터널 선샤인’은>
홍종선 : 사람은 영원하지 않아도 추억은 영원히 내 곁에 머문다. 좋았던 기억도 아팠던 기억도 오늘의 나를 있게 했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준다. 좋은 후배들과의 이 순간 대화도 내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이미.
류지윤 : 40대 50대에 다시 꺼내봤을 때 지금은 보이지 않던 무엇을 발견할지, 어떤 감상을 갖게될 지 기대되는 영화
유명준 : 기억이 사라질 수 있어도,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추억은 자그마한 단서 하나에도 부풀어 오른다. 몬탁 해변으로 오라는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