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조선은 미국(美國)을 이름처럼 아름다운 나라로 여겼다. 조선이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기 위한 청의 알선으로 조선과 미국이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지만, 이후 고종은 오히려 미국을 이용해 청의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1883년 미국은 조선에 전권공사(자기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에 파견되어 상주하면서 자기 나라 정부를 대표하여 외교 업무를 수행하도록 특명을 받은 외교 사절)를, 고종은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했다. 1887년에는 주미 조선공사로 박정양을 파견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청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고종의 시도는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1890년 조대비(신정왕후,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헌종의 어머니)가 승하했을 때 고종은 미국에 궁궐 호위 병력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여 조선에 군함과 해병대를 파견했다. 미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도덕적 외교’를 명분으로 제시했다. 미국이 이러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던 까닭은 청의 간섭으로 조선의 독립성이 손상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은 조대비가 승하하자 관례대로 조선에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청의 특사 파견은 과거부터 이어진 청과 조선의 관계 즉,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서구 열강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조선이 청의 특사를 관례대로 받아들인다면 조선 스스로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결국 고종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청의 특사 파견을 거부하고자 하였고, 만일에 대비해 미국에 군대를 요청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과 미국 간의 관계는 껄끄러운 문제였다. 당시 국제 관계에서 독립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속국은 정식으로 타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공사가 아닌 영사를 파견했다. 이를테면 오스만투르크의 속국인 이집트에는 각국에서 영사를 파견했다. 그런데 미국은 조선을 독립된 주권국으로 인정하고 전권공사를 파견한 것이다. 반면 청은 조선과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을 속국으로 보고 상무위원을 파견했다. 총영사급인 상무위원은 외교 의전상 공사보다 서열이 아래였기 때문에 상무위원인 위안스카이는 조선 내 외교관 사이에서 대우받지 못했다. 그는 조선에 특사 파견을 강행하여 청의 종주권을 확인시킴으로써, 자신의 위상도 함께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의도대로 청은 조선에 특사 파견을 강행했다. 조선에서는 관례대로 서대문 밖에서 고종이 청의 사신을 영접했지만, 그 현장을 천막으로 가려 외국인이 볼 수 없도록 했다. 이런 조선의 노력이 국제 관계에 영향이나 미쳤을까 회의적일 수도 있지만, 조선이 이전 관례대로 청의 특사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 서구 열강은 여전히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평가했다. 이 일로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고 판단했다면 외교 관계에 변화가 있었겠지만, 그런 후속 조치는 없었다.
사설이 길었지만, 사실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고종의 요청으로 미국이 조선에 군함과 해병대를 파병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도덕적 외교’에 대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을 자유의 상징으로 인식했고, ‘도덕적 외교’ 역시 이러한 미국의 가치로 이해했다. ‘한성순보’와 ‘황성신문’ 등에서는 미국이 건국 당시부터 이러한 가치를 견지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독립전쟁은 영국의 폭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여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도 소개했다. 특히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은 자유와 권리에 대한 미국의 숭고한 가치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고, 국권이 흔들리고 있던 조선에게 미국은 자유를 수호하며, 약소국을 도울 수 있는 도덕적인 나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성순보’ 등에서 보도되지 않은 미국의 이면이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 각지에서 미국에 강제로 끌려온 흑인 노예의 빼앗긴 자유와 권리였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아프리카계 흑인은 비록 노예와 같은 처지였지만,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러나 미국은 매사추세츠 등을 시작으로 18세기 중반까지 미 전역에서 노예제도를 합법화했다. 이들에 대한 처우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올 때부터 비참함의 극치였다.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통해 불거진 영국과 식민지 미국 간의 갈등은 결국 1775년 렉싱턴 전투로 이어졌고,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이후 영국군은 민병대 중심의 미군을 상대로 승리하였지만, 1778년 프랑스와 스페인 등이 미국 측에 가담하면서 전세는 점차 영국에 불리해졌다. 1782년 영국 의회에서 전쟁 중지를 결정하면서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결국 1783년 9월 3일 파리에서 영국이 미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은 백인 간의 전쟁으로 기억되지만,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준 부대는 이른바 ‘에티오피아 연대’라고 불리는 흑인 부대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수많은 흑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 중 일부는 ‘대륙군’ 즉, 미군 측에 가담하였지만, 흑인 해방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들은 곧 배제됐다. 반면 영국은 아프리카계 흑인에게 자유와 권리를 약속했고, 이에 수많은 흑인 노예가 농장에서 탈출하여 영국군에 가담했다. 버지니아 주지사였던 던모어(John Murray, 4th earl of Dunmore) 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연대가 대표적이었다. 에티오피아 연대는 ‘노예에게 자유를’(Liberty to Slaves)이란 문구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전투에 참여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당시 영국이 흑인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를 제안한 것은 단순히 전쟁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노예제도 폐지운동이 전개되었고, 대표적으로 아담 스미스 같은 인물이 노예제를 반대했다. 1772년 서머셋 대 스튜어트 사건(Somerset v. Stewart)의 재판에서 ‘노예제는 실정법을 제외한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the state of slavery is of such a nature, that it is incapable of being introduced on any reasons, moral or political; but only [by] positive law)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사실상 영국 내 노예제에 대한 법적 정리가 이뤄졌다. 이러한 영국의 노예제에 대한 인식이 흑인 노예를 영국군에 편입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이들을 동료 군인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미국에 비해 자유로웠다.
영국군에 가담한 흑인 노예에게 미국 독립전쟁은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비록 영국이 패배하면서 이들에게 자유와 권리는 멀어졌지만, 이후 이들은 영국이 제공한 배를 타고 서아프리카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천연두 등 각종 질병으로 사망했지만, 일부는 서아프리카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들이 서아프리카에 정착한 이후 세운 도시가 현재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Freetown)이다. 말 그대로 자유의 도시이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영국을 상대로 미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독립을 선포한지 거의 90여 년이 흐른 1865년이었다. 그것도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13조(제1항 노예 또는 강제 노역은 당사자가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면 합중국 또는 그 관할에 속하는 어떠한 장소에도 존재할 수 없다.)를 제정하기 위해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른 결과였다. 미국의 유색인종 차별은 지금까지도 여러 형태로 계속되고 있고, 이번 미 대선 직전에 치러진 민주당 경선의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고종은 아름다운 나라(美國)와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1조에 명시된 ‘거중조정’ 조항에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1월 23일 일본이 미국 정부에 철수를 요청하자, 바로 그 이튿날인 24일 주한 미국공사 모건은 대한제국과의 외교 관계가 종료되었음을 공식 선언하고 가장 먼저 철수하는 것으로 고종의 희망에 보답했다. 이로써 1882년 조선이 서구 열강 중 가장 먼저 체결한 미국과의 조약은 가정 먼저 일방적으로 파기됐다. ‘도덕적 외교’라는 허울 뒤에 자리한 국제 관계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