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공인 전자화폐, 20여년 만에 '종지부'
디지털 혁신 바람 뒤 종적 감춘 실패의 경험
우리나라 금융 시장에 2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한 화폐가 이번 달 소리 소문 없이 생을 마감하고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케이캐시란 이름의 전자화폐다.
존재감을 찾아볼 수 없었던 마지막 모습과 달리, 케이캐시의 시작은 시끌벅적했다. 1999년 첫 등장 당시 케이캐시는 금융권의 새로운 세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에 국내 모든 은행이 개발에 참여하며, 누구든 계좌만 있으면 언제든지 발급 받을 수 있는 시스템도 갖췄다. 이른바 한국형 전자화폐의 탄생이었다.
이후 케이캐시는 국내 전자금융거래법 상 전자화폐로서는 유일하게 법정 통화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발급받은 플라스틱 실물 카드에 은행 계좌로부터 돈을 충전한 뒤 가맹점에서 결제에 쓸 수 있는 형태로 사용이 가능했다. 아울러 교통카드와 신분증·학생증, 공인인증서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케이캐시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교통 기능은 과거 지역별로 달랐던 결제 수단이 티머니 등 전국에서 통용되는 카드가 등장하면서 힘을 잃었다. 통신 여건이 좋지 않은 군부대에서 활용되던 나라사랑카드 연계 옵션은 신용카드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면서 의미가 사라졌다. 결국 케이캐시는 월 사용액 80만원이라는 초라 성적만을 남긴 채 작별을 고하게 됐다.
그리고 20여년 지난 지금, 유행이 돌고 돌 듯 금융권에는 다시 디지털 바람이 불고 있다. 케이캐시로 시도된 디지털 화폐 역시 다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나서면서 새로운 디지털 화폐에 대한 논의는 급물살을 타는 형국이다. 한은은 올해 디지털 화폐 파일럿 테스트를 추진하는 등 이전과 달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패작이란 낙인 때문일까. 케이캐시는 새 디지털 화폐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못하며 감춰져야 할 치부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금융권에서 모두 지금까지 잊고 지내 왔던 것처럼 이를 조용히 기억에 지울 수 있길 바라는 분위기다.
반면 다르게 바라보면 케이캐시는 반면교사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유산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올 디지털 화폐가 범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란 얘기다. 이런 소중한 경험을 쉬쉬하는 것이야 말로 케이캐시를 마지막까지 사장시키는 패착이 될 수 있다.
최근 금융권에선 디지털 혁신이란 구호가 전가의 보도처럼 통용되는 분위기다. 그 속에서 과거는 결별과 극복의 대상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험난한 도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건 실패의 경험이기도 하다. 금융권으로서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격언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