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정지시켰고, 인류의 사고방식을 바꿨다. 인류는 6700만 명이 감염되고 153만 명이 사망하자 ‘피해자’임을 호소하며, 손에 잡을 수 없는 바이러스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마저 높인다. 그러나 이 감염병의 확산에 인류가 무조건 ‘피해자’인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가 그 감염병을 이용해 더 악랄한 가해자가 된 과거가 숱하게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의 ‘매독’이 그렇다.
식민지 조선의 ‘매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서구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어, 서구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던 일본의 상황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19세기 후반, 질병이 매개체를 통해 전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리’, ‘손’, ‘식품’ 등이 ‘감염원 3가지(infective trio)’라는 식으로 주요 감염 경로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비누로 손을 씻었고, 파리 같은 작은 벌레가 결핵 등 심각한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이러한 감염병은 발병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워 한번 유행하기 시작하면 일단 환자를 격리하는 것이 사실상 대처 방법의 전부였다. 성병 특히 매독 역시 이러한 전염병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일본은 성병을 이른바 ‘화류병’이라 부르며 여성을 주요 감염원으로 지목하였다. 일본이 개항할 당시 서구 열강은 일본을 ‘매독의 온상지’로 지목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공연하게 매독에 대한 예방 조치를 요구했다.
개항기 일본 정부는 서구 열강의 선원 등을 상대하기 위해 접객 여성을 모집하였고, 많은 경우 서양인들은 이 접객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사실상 매독의 온상지로 여겨진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일본은 매독을 서구에서 전래된 전염병으로 인식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일본에 매독은 존재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장 중 한 명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주요 사인 역시 매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개항한 직후부터 서구 열강은 조계지 내 자국민의 보호를 이유로 일본 접객 여성에 대한 매독 검사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결국 일본은 영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영국인 거류지가 있던 요코하마에 매독 검사소를 설치하고, 영국 해군 군의관에게 운영을 맡겼다. 점차 매독 검사소는 요코하마뿐 아니라 주요 개항장과 도시에도 설치되었고, 일본은 여기서 이른바 ‘접객 여성’이 주기적인 검진을 받도록 법제화하였다. 사실상 여성을 매독 전염의 주요 매개로 인식한 결과였다.
일본의 이러한 조치는 영국의 성병 관리에 대한 1864년 법률(Contagious diseases Act)을 모방한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이 법이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로 이어졌다는 이유로 조세핀 버틀러(Josephine Butler)가 주도한 폐지 운동이 전개되면서 1886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성병 관리 체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1876년에는 관련 법률(‘창기매독검사규칙’)을 제정하여, 매월 5일에 매독 검사를 받도록 하였다. 1878년에는 지방까지 검사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요일을 지정하여 지역별로 매독 검사를 받도록 법률을 개정하였다.
문제는 여성을 상대로 한 매독 검사가 단순히 검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매독으로 진단될 경우 격리와 함께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당시 매독 치료의 주요 방법은 수은을 이용한 훈증법이었다. 1909년 이른바 ‘마법의 탄환’이라고 불린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 606’이 개발되었지만, 여전히 수은을 이용한 훈증법과 함께 사용하였다. 이러한 매독 치료법은 항생제가 나오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치료 대상자는 이 과정에서 수은에 중독되었다.
수은 중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자장수, 즉 ‘매드해터 증후군(mad hatter syndrome)’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당시 가죽 모자를 만드는 이들 사이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은을 사용하여 가죽을 무두질하기 때문에 장기간 수은을 흡입하게 된 결과였다. 수은 중독은 초기에는 우울증, 불안, 불면, 잇몸 출혈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말기에는 중추신경계 등이 마비되면서 보행곤란, 시력 및 언어 장애 등이 나타난다. 이처럼 수은 중독은 극심한 장애와 통증을 동반하기 때문에 매독으로 판정받은 경우, 치료를 기피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여성이 성병의 주요 매개라는 일본 정부의 인식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보호국화한 우리나라의 여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일본은 처음에는 한국 내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매독 검사를 시행하였지만, 보호국화한 이후에는 이른바 ‘시정개선’이라는 명목하에 우리나라 전역의 수많은 여성에게 매독 검사를 강요하였고, 이것을 이른바 ‘근대화’라는 포장을 덧씌우는 식으로 선전하였다. 심지어 요리점에서 일하는 예기(藝妓)조차 성병검사를 의무화하였다.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대한제국에 일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면서 일본 정부의 성병 관리는 더욱 강화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매춘업이 증가하면서 일본군 성병 환자가 급증했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요리점에서 손님의 숙박을 금하고, 접객 여성을 예기와 작부로 구분하여 관리하였다. 하지만 요리점 등에서 일하는 여성이 해당 지역을 벗어날 때는 지역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성병 검사 역시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일본 의사가 검사하도록 하였다.
당시 일본의 매독 검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검사가 육안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질병을 매독으로 오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검진 대상을 확대하면서 의사가 아닌 경찰이 대행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오진은 더욱 많아졌다. 1906년 독일에서 바세르만 혈청 검사 방식이 개발된 이후 일본에서도 이를 도입했지만, 바세르만 방식 역시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우선 다른 질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매독 양성 반응이 나타날 수 있었고, 매독 1기의 경우 절반 정도, 2~3기의 경우 80% 정도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오진 비율이 매우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검사 범위를 더욱 확대하여 검사 연령을 18세에서 15세로 낮추었고, 예기 및 작부 등이 거주지 외에서 숙박하는 것은 물론 거주지에서 1리 이상 벗어나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군이 주둔한 지역에서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고, 만일 일본군이 성병에 걸렸을 경우 감염 경로를 추적한다는 명목하에 주둔지 인근 접객 여성을 대상으로 처벌에 가까운 검진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에서 검진 받은 인원은 1911년 2만 7539명에서 1915년에는 5만 904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조치는 일본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한국 여성을 성병의 매개로 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후 더 이상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배려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제국 일본의 식민지이자,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서의 조선만이 존재했다. 제국 일본의 질서 속에 강제 편입되면서 영토뿐 아니라, 우리의 가족조차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올해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전쟁을 선포한 지 100주년이다. 임정에서 ‘독립대전쟁’을 선포한 것은 단순히 우리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바탕에는 우리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 또한 포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강점기의 치욕과 독립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