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독감, 1차 대전 후 군인들 통해 전세계 전파
1918년 조선서 발병환자 7백만명, 14만여명 사망
1914년부터 시작해 1918년 11월 끝난 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경험한 적이 없었던 전쟁이었다. 세계 대부분의 대륙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거의 모든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거나 휘말렸다. 사상자 역시 인류가 경험한 모든 전쟁 이상이었기에 당시 신문은 이 전쟁을 ‘Great War’라고 불렀고, 이 전쟁이 끝나면 모든 국제적 갈등은 해소될 것이라는 어설픈 희망에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유럽 대륙이 주요 전쟁터였지만, 여기에는 유럽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터번을 두른 인도인이 영국군의 일원으로 참호를 지켰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온 베트남인은 프랑스 군의 일부로 블라디보스톡 항에 상륙하여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이처럼 세계 각지가 전쟁터였지만, 특히 전쟁의 중심은 프랑스였다. 그렇기에 낭만과 패션의 도시 파리는 전 세계에서 모인 연합군이 전선을 향해 떠나는 주요 도시로 변모하였다.
전선에서 연합군과 동맹군 간의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전선을 향해 떠나는 기차는 군인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돌아오는 기차에는 텅 비었거나,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어떤 날은 하루에 수 만 명의 군인이 전사했고,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한 영국군의 경우, 부대원들이 모두 같은 날 전사하기도 했다. 그러면 전사자들로 인해 생긴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이들을 태운 기차가 어김없이 전선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1918년 11월 11일 이후 전선을 향해 출발하는 기차에는 군인이 타고 있지 않았다.
이제 파리역에 도착하는 기차에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희망에 부푼 군인들이 가득했다. 이들에게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집에서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신문 광고란에는 전쟁터에서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고 이제는 펜을 들어야 할 때라는 만년필 광고가 실렸고, 바구니에 선물을 가득 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바구니에 선물을 가득 싣고 최신 비행선을 타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삽화가 실렸다.
하지만 이들이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은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아니었다. 당시 전쟁을 마친 군인들은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이른바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인플루엔자는 처음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1918년 4월 미군이 본격적으로 유럽 전 지역으로 퍼졌다. 이렇게 확산된 인플루엔자는 참호전이 계속되면서 잠시 증가 추세가 주춤했으나 전쟁이 점차 소강상태가 되고, 동맹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다시 유럽에서 군인을 따라 중부유럽으로 그리고 귀향 군인을 따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약 5억여명이 이 병에 감염되었고, 최소 1000만명 이상이 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인플루엔자는 흔히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지만, 처음 확인된 것은 1917년 미국의 훈련소에서였다. 유럽 전선에 투입되기 위해 훈련 중이던 군인들 사이에 전파된 인플루엔자는 그대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연합국과 동맹국은 언론 통제로 이러한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 주로 이 감염병에 대해 보도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인플루엔자는 당시 일본에 지배를 받던 조선까지 확산되었다. 그 전염 경로 역시 주로 일본을 경유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을 틈타 동북아시아 각지에서 독일의 식민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심지어 체코군의 철수를 빌미로 시베리아에도 군대를 파병하여 바이칼호까지 일본군을 주둔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인플루엔자의 주요 매개체가 되어 각지에 감염을 확산시켰다. 일본군의 피해도 심각했지만, 각 지역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조선 역시 이 과정에서 인플루엔자가 퍼져나갔다.
당시 서울에서 의료 활동 중이던 스코필드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1918년 9월부터 감염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10월에는 확산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무렵, 신문에서도 유행성 독감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독감의 확산세가 잠잠해진 것은 해를 넘긴 이후였다. 하지만 여전히 재확산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집회 등을 금지하였다. 총독부는 1918년 인플루엔자 발병 환자가 약 700만 명이며, 그 중에 14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집계하였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18년 인플루엔자의 대응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적 장례문화와 일본의 화장 풍습이 충돌하였고, 일본이 자신들의 장례 문화를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면서 1919년 3.1운동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1918년 인플루엔자의 처리 과정에는 두 나라의 전통적 가치가 충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역간, 국가간 이동이 빈번하지 않았던 당시 해외 주둔 일본군의 교대에 따라 전염 지역이 확장되고, 그 시기까지 일치한다는 점은 사실상 일본군이 주요 감염 매개체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과 그 첨단에 있던 군대는 식민지 수탈뿐만 아니라 당시 치명적인 감염병까지 확산시킨 주범이라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11월 넷째 주 목요일은 추수감사절이다. 마치 우리의 추석처럼 헤어졌던 가족이 함께 모여 칠면조 요리를 나누어 먹는다. 심지어 그 다음날은 미국에서 연중 가장 큰 쇼핑 시즌인 블랙 프라이데이다. 얼마 전 뉴스를 살펴보니 미국 항공업체가 COVID-19 확산 이후 최대 성황을 이루었고, 공항이 사람들로 가득찬 장면이 보도되었다. 이번 우리 추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부디 미국 역시 지난 추수감사절과 금요일 이후에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1918년 인플루엔자 재확산 양상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길 바랄 뿐이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