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가에 여성 감독, 배우들이 중심이 된 작품들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지난달 21일 개봉해 100만 관객을 돌파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11월에는 '애비규환' '내가 죽던 날'은 관계 속에서 용기를 얻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서사를 담고 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1991년 벌어진 구미 낙동강 폐수 유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로, 대기업의 고졸 출신 직원들이 회사의 비리를 알게 된 후 직접 파헤쳐 세상에 폭로하기 위한 여정을 담았다. 출근하자마자 정직원들 쓰레기통 비우기, 커피 타기, 구두 대신 닦아오기 등 '노동비가 싸고 말 잘 듣는' 여직원들의 업무였다. 회사 피라미드 구조에서 맨 바닥에 위치한 이들이, 각자의 역할을 나눠 비리를 알아내고 대기업과 맞서는 내용은, 2020년에도 공감과 용기를 주기 충분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손 잡아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면 '애비규환'은 모녀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이 작품은 최하나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임신 5개월이 된 토일(정수정)이 친아빠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뚜껑을 열고 살펴보면 엄마 선명(장혜진)과 토일 모녀의 관계에 더 집중하고 있다. 친아빠의 흔적을 찾아 내려간 고향에서 어린 시절 기억과 마주하고, 항상 자신의 옆에는 엄마가 있었다는 걸 알게된다.
토일이 5개월 동안 임신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에 상처 받고 걱정하지만 까칠하고 모진 말로 딸과 기싸움을 하는 엄마, 그런 엄마의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결국 하고 싶은대로 하고야 마는 딸의 관계가 당연해서 소중하다고 자주 잊고 사는 현실적인 모녀 관계를 들여다본다. 아빠가 두 명이나 있지만 토일은 결혼식장에 "가장 편한 사람"인 엄마와 손을 잡고 들어가며 유쾌하게 모녀 관계의 화해를 표현했다.
'내가 죽던 날'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연대를 내밀하게 표현했다. 현수는 남편의 불륜, 세진은 밀수죄로 잡혀들어간 아빠로 인해 삶이 한 순간에 바뀐 인물들이다. 변호사인 현수의 남편은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현수가 후배 형사와 바람을 폈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고 현수의 삶은 균열이 시작됐다. 상사는 복직 전 세진의 자살 사건만 마무리 해달라고 제안하는데, 세진을 조사할 수록 자신과 닮아있음과 석연치 않은 마음이 피어올라 자살로 종결할 수가 없다.
누구의 상처가 더하다, 덜하다 말할 순 없지만, 현수가 세진에게 내미는 손이, 순천댁이 세진에게 갖는 연민이 서로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영화다. 특징은 서로가 혈연, 지연, 그 어떤 접점도 없는 남이라는 것이다. 자신과 닮은 상처를 가진 남을 위로하며 함께 벼랑 끝에서 걸어나오는 연대란 관계가 공감을 준다.
사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많아진 현실은 특별히 눈에 띄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성장에서 관계로 이어지는 변화와 흐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82년생 김지영' '소공녀' '야구소녀' '69세' 등 많은 작품이 꾸준히 여성의 입장에서 차별받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성장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최근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변의 인간관계까지도 조명해, 그 안에서 치유 받아 나아가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는 사회를 반영한 것이다.
이같은 흐름은 서울독립영화제2020 출품작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최근 3년 동안 여성 감독과 더불어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이야기하는 작품 편수가 늘었다. 본선 경쟁작 26편 중 '서정시작법' '희지의 세계' '외숙모' '송유빈은 못말려' '자매들의 밤' '여름의 나무들' '이별여행' '고양이는 자는 척을 할까' '조금 부족한 여자' '실버택배' '실' 등 11편이 여성들의 가족, 친척 주변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선정됐다.
김동현 집행위원장은 "지금 시대가 여성의 이야기를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고 평했고 허남웅 영화 평론가는 "여성 서사가 관계로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그 안에서의 깊어진 관계가 영화를 통해 보여지고 있다"며 "계속해서 성숙하고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분석했다.
한 영화 관계자는 "최근 몇년 동안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감독들을 지지하는 관객층이 두터워졌다. 예전에는 상업적인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가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만 해도 100만 돌파와 함께 N차 관람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닌 중심에서 충분히 다룰 말한 가치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