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 영화 연이은 참패, 이유는 여성 무시?
<김헌식의 문화 꼬기>불황땐 남성성 선호된다는 고정관념 버려야
하나같이 누아르 영화가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 원인은 여성들에게 남성 캐릭터와 스토리를 일방적으로 강요했기 때문이다. 영화 '하이힐'에는 강한 남성적인 매력을 가진 주인공 남성이 등장하는데, 그 주인공은 강한 남성적 매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여성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여성들은 별로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남성들이 여장을 하고 웃기는 코미디 영화라면 또 모를 것이다. 오히려 강한 남성이 아닐 지라도 남성 자체의 매력을 뿜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겠다.
영화 '아저씨'의 복제판이라는 영화 '우는 남자'는 '운다'는 이름만 감성을 건드릴 뿐, 영화의 스토리에서 전혀 이 같은 감성을 충만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사실상 영화 '아저씨'의 감성조차 이어받지 못하고 껍데기에 불과한 액션 씬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같은 감독의 작품인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은 비밀에 싸여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가운데 어린 소녀를 보호하기 위한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주인공이 보호하려는 소녀에 관객들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 '우는 남자'에서는 소녀는 죽고, 소녀를 죽인 잘못에 대한 자책감에 소녀의 엄마를 살려주려 자신의 목숨까지 하찮게 생각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너무 관객들을 압도해 버렸다. 관객들은 소녀의 엄마에 동일시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총격씬만 작렬한 가운데 작렬의 액션 장면의 스토리텔링은 뒷전이 되었다.
영화 '황제를 위하여'에는 총질 대신 칼질이 난데 없이 작렬했다. 난데 없는 칼질은 잔인한 장면을 연이어 배치했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사이로 눈요기를 위한 여배우의 노출이 작위적으로 등장해 버렸다. 물론 여성의 노출과 정사신은 개연성 있는 스토리와 거리가 멀었다. 여기에 로맨스 스토리는 전혀 배려를 받지 못했다.
영화 '좋은 친구들'은 영화 메인 홍보 포스터의 웃음짓는 세 친구들의 모습과 달리 비극으로 충만했다. 폭력과 노출이 배제된 점은 다른 누아르 영화와 다른 점이지만, 로맨스와 러브 스토리가 없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다루어 실험적(?)이지만 애매한 영화가 됐다.
그나마 버틴 것은 영화 '신의 한 수' 였다. 주인공이 성장해가면서 마침내 복수를 이뤄가는 과정은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냈다. 액션은 화려했지만 복수의 단계에 맞게 짜임새 않는 스토리 설정 속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적어도 폭력의 남발이 영화적 미학과 대중성을 확보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났다. 이 와중에 바둑이라는 소재는 신선함을 부각시켰다.
장르 영화가 이제 대중 속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인식 때문일까. 관객들은 매력적인 남성들을 영화에 등장시킨다고 영화관을 찾지는 않는다. 심지어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이 등장한 영화 '역린'에서도 감성적인 코드는 물론 러브 스토리도 없었다. 물론 대체적으로 '역린'을 기대에 부응한 작품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노출에 의존하는 영화라면 IPTV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소비가 가능하다. 흥행을 생각한다면 감성적인 스토리 라인을 잘 구성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 위에 액션이든 노출이든 아니면 실험적 시도이든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성장 경제에 관해 문화콘텐츠의 두 가지 신화가 있다. 하나는 저성장의 불황기에는 경제적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강한 리더십 즉 강한 남성성이 선호될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생각에 빠지면 남성성의 매력이 충만한 문화콘텐츠가 선호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장르적으로 누아르 영화도 먹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성들의 선택권이 높아지면서 이런 남성적 매력을 가진 캐틱터들에 대한 선호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본질적으로 누아르 영화는 크게 흥행할 요소를 갖지 못한다. 만약 흥행을 생각한다면 적절한 평가기준에 관객 수는 별로 중요하게 고려 되지 않아야한다. 장르를 대중의 기호에 맞게 변형 융합 시키는 길 밖에 없다. 무엇보다 남성성의 매력은 자기들만의 것이 아니라 포용과 소통의 쌍방향 속에 존재한다.
글/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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