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목표 '고객‧근로자‧채권자‧지역사회' 공동이익으로 확장
'투쟁' 자체가 존재의미인 강성 노조 지도층에는 '위협'으로 인식될 수도
경영계 선제적 변화 노력이 尹정부 노동개혁 명분으로 작용 기대
대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국내 주요 기업들이 참여하는 ‘신(新)기업가정신협의회’가 24일 출범한다. 부친, 혹은 조부 시절의 ‘사업보국’에서 한 발 나아가 혁신성장은 물론, 이해관계자와의 상생, 친환경 경영, 사회적 문제 해결 등으로 ‘의무의 범위’ 확장에 나선 기업인들이 반기업정서의 악연을 끊고 존경받는 사회 리더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관심이다.[편집자 주]
우리나라 산업계의 오랜 병폐 중 하나는 극단적인 노사갈등이다. 이는 기업에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뿐 아니라 계층간 대립, 국론분열, 소득양극화 등 각종 사회적 문제와도 연관된다.
신기업가정신 선언을 통해 사회적 문제 해결에 나선 기업들로서는 자신들이 직접 연관된 노사갈등 문제부터 푸는 게 최우선 과제일 수 있다.
24일 선포 예정인 신기업가정신 선언문에는 주주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주주자본주의에서 경영목표를 고객, 근로자, 채권자, 지역사회의 공동이익으로 확장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고객은 물론 조직구성원과 주주, 협력회사와 지역사회 등 기업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자를 소중히 여기고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업가정신을 선언, 실천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5대 신기업가정신 실천 명제 중 ‘조직구성원이 보람을 느끼고 발전할 수 있는 기업문화 조성’ 역시 노사관계의 개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조직구성원을 존중, 배려하고 역량 계발을 지원하며, 안전하고 건강한 근무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내용으로, 일부 기업들은 이미 노사간 협의체를 통해 진행 중인 사안이기도 하다.
노사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자 측이 먼저 노력하겠다는 메시지를 노동계에 던진 셈이다.
특히 노사관계에서 사용자 측의 입장을 대변해온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수장 손경식 회장이 이번 신기업가정신 선언에 참여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경총은 그동안 우리 경제시스템이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계의 경영간섭을 강하게 배척해 왔다.
이같은 경영계의 전향적 움직임은 경직된 노사관계를 유연하게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문제는 노동계에서 경영계의 전향적 태도를 수용할지 여부다. 일각에서는 양대노총과 주요 대기업 노조의 정치집단화, 권력화가 노사간 대립구도를 유지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노사관계 개선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본다.
과거 노동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우리나라 노동계는 ‘투쟁’을 통해 성장해 왔고, 현장 투쟁가들이 양대노총을 거쳐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게 일반화됐다”면서 “근로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보단 사용자측을 물리쳐야 할 대상인 자본가로 규정짓고 투쟁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권력집단화된 노조 핵심 인사들로서는 투쟁의 당위성이 사라지면 자신들의 존재 의미가 흔들리는 만큼 노사관계 개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지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경영계에서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노동계에서도 일부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야 타협이 이뤄질 수 있는데, 강경 노동운동권에서는 ‘타협’이라는 용어 자체가 ‘변절’과 같은 의미로 쓰일 만큼 거부감이 크다”면서 “경영계의 노사관계 개선 노력이 노동계 지도층에는 오히려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재계의 노사관계 개선 노력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개혁을 연금‧교육개혁과 함께 가장 시급한 3대 개혁 과제로 제시한 상황에서 재계의 전향적 움직임이 명분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세계적인 산업구조 대변혁 과정에서 경쟁력을 제고하고,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노동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노사간 힘의 불균형을 재조정하고,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를 참여 협력적 노사관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다.
재계 한 관계자는 “노사갈등의 원인이 노동계와 사용자측 모두에게 있다는 양비론(兩非論)으로 흐른다면 노동개혁의 당위성이 약해질 수 있다”면서 “기업들이 먼저 변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노동개혁의 추진 동력도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