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감독, 장편 데뷔작
서로를 잘 모르는 남녀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함께 기묘한 여정을 떠난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우울에 잠식당한 남자 모인(강길우 분)과 화림(박가영 분), 두 사람이 죽기 위해 떠나는 한 편의 로드무비 '온 세상이 하얗다'는 무거운 분위기로 이어질 것 같지만,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대사들이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오게 한다. 두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죽어야지, 오늘은 죽어야지'란 매일 하는 남자 모인. 그는 알코올성 치매로 죽겠단 다짐을 잊고 매일 아침 눈을 뜬다. 그런 모인 앞에 같은 동네 주민 화림이 우연히 나타난다. 화림은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우울함과 무력감으로 하는 말마다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매일 많은 일들을 잊는 모인에게 화림의 거짓말은 큰 의미도 영향도 없다. 이에 화림은 매일 다른 이름, 다른 직업을 대며 모인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함께 술을 먹다 우연히 모인의 사정을 알게 된 화림은, 그가 태백에서 죽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동행한다. 자신도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반자살 파트너가 된 두 사람은 서울에서 태백의 까마귀 숲에 오르기까지 허공에 휘발되고 마는 농담들이나 진지하지만 엉뚱한 말들을 주고 받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한 발짝 멀어져 이들을 보고 있자면 사랑스럽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다 가끔씩 슬픔에 젖은 본연의 모습이 튀어나온다. 동병상련의 마음일까. 많은 말들을 주고받지만 그 순간만큼은 에둘러 위로하거나 손을 내밀지 않는다. 처음 만난 날 길가에 붙어있던 '밤길을 안내해 주는 조명 길 찾기 시스템' 간판이 마치 두 사람의 관계같다.
동네에 떠도는 개를 걱정해 집을 만들어주려 한다거나, 까마귀 숲에 도착해 죽으려는 사람을 살리는 행위들은, 이들의 상황과 목적과 모순되며 웃음을 안기기도 한다. 30년 만의 한파에 "추우니까 빨리 죽어야겠다"던 이들이 실제로 목적에 달성했는지, 실패했는지 결말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죽기 위해 밧줄과 의자를 들고 헉헉대며 다시 까마귀 산에 오르는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그리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드디어 '온 세상이 하앟댜'. 하얗게 쌓인 눈은 녹기 전까지, 원래의 상태를 잠시 감춰준다. 그 위에 두 사람이 새 발자국을 찍을지, 녹기까지 기다린 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지는 각자의 해석에 맡긴다.
살다 보면 자신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보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속 이야기를 터놓는 일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날 모르기 때문에 선입견도 없을뿐더러, 나의 밑바닥까지 내보여도 비교적 수치심이 덜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바라봐 준다. 애정이나 우정이란 단어로 정의하기는 애매한 어딘가에 속해있다. 김지석 감독은 모인과 화림의 관계처럼 영화와 관객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온 세상이 하얗다'는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제20회 전북독립영화제 국내경쟁-장편 부문에 진출한 김지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1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