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 고리 끊고 정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지주회사 체제 만들어야
미래산업 이끌 R&D 인력 잡으려면 연공서열식 임금체계 변화 불가피
정의선 회장이 2년 간 수석부회장, 그리고 1년 간 회장의 위치에서 그룹을 이끌며 보여준 여러 성과와는 별개로 안정적 경영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지난 2018년 시도했다 시장의 반대에 부딪쳐 철회했던 지배구조 개편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월 현대차그룹 동일인을 정몽구 명예회장에서 정의선 회장으로 변경했다. 동일인은 기업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집단 지정 자료와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진다.
정 회장이 동일인으로 지정되면서 정부가 시장 지배력 남용과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의 규제의 잣대로 삼는 기준점 역시 정 회장이 됐다.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규제 관련 사안들이 ‘미래’가 아닌 ‘현재’의 숙제가 된 셈이다.
내년 대통령선거 이후 들어설 새 정부가 지난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때와 마찬가지로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대기업 집단에 지배구조 개편을 서둘 것을 종용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최대한 서둘러 순환출자 고리를 끊되 정 회장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묘수를 찾아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큰 틀에서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다. 이 고리를 끊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은 기아→현대모비스의 모-자회사 관계를 해소하고 현대모비스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정 회장의 현대모비스 지분은 0.32%에 불과하다.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이 7.15%를 보유하고 있지만 아직 상속이 이뤄질 상황은 아니고, 상속을 하더라도 상속세 문제가 걸려 있다.
결국 정 회장이 가진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오토에버 등 다른 계열사들의 지분을 활용해 현대모비스 지분을 취득하는 게 최선이다.
지난 2018년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의 투자 및 핵심부품사업부를 존속법인으로 두고 A/S 부품 및 모듈 사업부를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0.61대 1 비율로 합병하는 방식의 지배구조 개편을 시도했다 시장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정 회장이 직접 나서 시장과의 소통 부족을 인정하고 “여러 의견들을 전향적으로 수렴해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겠다”고 밝힌 만큼 2018년 개편안은 다시 시도되긴 힘들어졌다.
다른 방식으로는 현대글로비스를 최상위 지배회사를 두는 시나리오도 언급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가 자동차 반조립(CKD) 사업부를 기아차에 넘기고 그 대가로 기아차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이다. 현대글로비스의 CKD 부문 사업가치는 4조원대로 평가돼 기아차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의 대가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내년부터 시행되는 ‘공정경제 3법’ 중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포함된 ‘일감 몰아주기 금지 강화’ 조항이 걸림돌이다. 개정안은 내부거래 규제대상이 되는 총수 일가의 지분을 기존 30% 이상에서 20% 이상으로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완성차와 부품 유통이 주업인 현대글로비스의 사업구조로 인해 정 회장을 비롯한 오너 지분율을 20% 미만으로 낮춰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정 회장은 현대글로비스 지분 23.29%를 갖고 있으며, 정몽구 명예회장이 가진 6.71%를 포함하면 30%다. 연말까지 10%를 처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장 잡음이 적은 방식은 정 회장이 보유한 계열사들 지분을 매각해 마련한 자금으로 기아차로부터 현대모비스 지분을 취득하는 것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이 최근 기업공개(IPO) 추진에 나선 것도 이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현대엔지니어링의 기업가치는 10조원 안팎으로 평가되며, 상장 이후 시장에서 이 수준의 시가총액을 인정받는다면 이 회사 지분 11.72%를 보유한 정 회장은 지분 매각을 통해 1조원 이상의 실탄을 마련할 수 있다.
정 회장이 9.57%의 지분을 보유한 현대오토에버도 이달 초 현대엠엔소프트와 현대오트론을 합병하며 덩치를 키웠다. 다른 주요 주주가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인 만큼 정 회장의 지분을 매각해도 지배구조상에는 문제가 없다.
무엇보다 정 회장이 가진 가장 큰 재원은 현대글로비스 지분이다. 내년 초 공정거래법 개정안 이슈가 걸려있는 만큼 올해 중으로 이 지분 일부를 현금화해야 한다.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지배구조 개편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정 회장이 사재를 들여 매입한 보스턴 다이내믹스 지분이 변수가 될 수 있다.
지난 6월 거래 완료 당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가치는 약 11억달러(약 1조3000억원)로 평가됐으며, 정 회장은 20%의 지분을 보유했다.
향후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현대차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동안 개발해놓은 선도 기술들을 상용화하고 덩치를 불린 뒤 상장한다면 정 회장이 가진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지분이 지배구조 개편에 있어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정 회장 외에도 현대차(30%), 현대모비스(20%), 현대글로비스(10%) 등 계열사들이 6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상장 이후 정 회장의 지분을 현금화해도 현대차그룹 내에 두는 데는 문제가 없다.
정 회장 취임 이후 가속화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의 체제 전환을 위해서는 기존 생산직 위주의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도 성과에 근거한 합리적 임금체계로 개선하는 일도 시급하다.
정보통신기술(ICT), 배터리, 로보틱스,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분야 연구개발(R&D) 인력과 신시장 개척을 위한 마케팅 인력을 포함한 다양한 사무·연구직 인력의 수혈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생산직 노조와의 교섭에 따라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임금체계가 유지된다면 사무·연구직 인력 이탈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현대차그룹 주력 계열사들은 올해 들어 신입사원이나 저연차 직원들의 잇단 이직으로 인력 공백이 발생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직 기업은 주로 ICT·금융 기업들로, 기존보다 좋은 대우를 받고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사무·연구직 직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임금과 성과급 체계다. 일단 연봉 수준이 다른 대기업들에 비해 낮다. 현대차·기아 신입 사원의 기본급은 지난해 기준 4300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이나 매출 규모가 현대차·기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ICT 기업 초임이 5000만~6000만원대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이탈 직원들을 잡아두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특히 노사 교섭에 따라 동일하게 지급되는 현대차·기아의 성과급 지급 방식으로 인해 스펙이 좋은 저연차 사무‧연구 직원들은 ICT 기업에 들어간 비슷한 또래들이 연말마다 수천만원 씩의 성과급을 지급받는 것을 보며 박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개별 성과를 측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생산직과 달리 사무·연구직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 다른 보상을 받길 원한다. 내부적으로 “노력이나 성과와 무관하게 모든 직원들에게 동일한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은 일의 동기 부여나 성취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연공서열식 임금체계에서는 R&D 분야 핵심 인력을 지키기 위해 해당 직군의 저연차 직원 연봉을 크게 올리려면, 호봉이 높은 생산직들은 더 높은 금액을 올려줘야 한다. 임금체계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해결 가능한 일이다.
정 회장도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16일 직원들과의 ‘타운홀 미팅’ 자리에서 ‘성과 보상에 대한 직원들의 생각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많이 노력해 주신 직원들이 회사에 기여를 한데 비해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 굉장히 죄송스럽게 생각했고,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고 답했다.
정 회장은 ‘성과급 지급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성과에 대해서 공정하고 투명하게 평가를 해, 보상이나 승진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계열사 전체에서 임직원들의 눈높이에 맞춰 좀 더 정교하게 선진화가 돼야 하고, 문제가 있다면 빨리 바꿔서 직원들께서 정말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산직 위주의 노조가 강력한 힘을 가진 지금의 노사관계에서 임금체계 개편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로보틱스나 UAM 등 미래사업 분야에서 성과가 있을 경우 그 보상을 해당 분야 R&D 부서에만 지급하는 방식으로 성과급 체계를 바꾸려 한다면 완성차 생산직 조합원이 대부분인 노조의 반발의 부딪칠 가능성이 크다.
재계 한 관계자는 “노동계 우위의 힘의 불균형이 심한 국내 여건상 현대차그룹과 같이 전통적 제조업 분야에서 다수의 생산직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들이 임금체계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긴 쉽지 않다”면서도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을 미래 모빌리티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스마트한 조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