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인도지원, 정치 엘리트나
평양시민들에 한정적으로 지원돼"
"바나나를 건네니 어쩔 줄을 모르더라"
전·현직 북한 주재 유럽대사들이 평양 근무 당시 겪은 일화들을 소개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시장화 흐름이 뚜렷해졌지만, '극단적 계급격차'로 상징되는 북한식 사회주의 모순은 지속되고 있다는 평가다.
두 차례 평양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토마스 쉐퍼 전 독일대사는 지난달 31일 개최된 한반도국제평화포럼에서 부인과 함께 북한 현장근로자들에게 바나나를 건넸던 일화를 소개했다.
쉐퍼 전 대사는 2007년부터 3년여간 평양에서 대사직을 수행한 뒤, 2013년 다시 한번 대사 자격으로 북한을 찾았다. 그는 대사 임기가 끝나던 2018년 은퇴했다.
그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해야만 했다"며 "당시 현장 근로자들이 도와줘 부인이 바나나 송이를 건넸다. 그런데 바나나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것(바나나)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왔다"고 말했다.
쉐퍼 전 대사 부부는 바나나 껍질을 직접 벗겨가며 '음식'이라는 것을 일러줬다고 한다. 다만 그는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어느 시점에 '바나나 일화'를 겪은 것인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바나나를 난생처음 보는 평범한 북한 주민과 다르게 평양의 일부 상류층은 '사치품'을 향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3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북측이 북미대화 재개 조건 중 하나로 고급 양주 및 양복 수입을 위한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정보위 야당 간사인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은 북측이 '평양 상류층을 위한 생필품 보급용'으로 사치품에 대한 수입 허용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쉐퍼 전 대사는 국제사회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 물품이 상류층에 선별적으로 제공되는 일이 허다하다고 밝혔다.
그는 국제사회를 통해 "인도주의 지원이 이뤄질 때 신분 차별 없이 가장 필요한 주민들에게 지원이 이뤄져야 하고, 어떻게 지원되고 있는지 투명하게 감시(모니터링)돼야 하지만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정치적 엘리트나 평양시민들에게 한정적으로 지원되는 구조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제사회로부터 코로나19 백신을 지원받기로 한 북한은 국제기구 요원들의 방북을 불허하는 등 모니터링 체계 구축에 난색을 표하는 상황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 시대, 시장화 진전"
최근 들어선 통제 기조 강화
코로나19 영향으로 지난해 평양을 떠나 본국에서 업무를 수행 중인 콜린 크룩스 북한 주재 영국대사는 북한의 시장화 확대를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크룩스 대사는 지난 2008년 평양에서 수개월 간 부대사로 일한 바 있으며, 지난 2018년부터 현재까지는 대사직을 맡고 있다.
그는 10년 사이 변화한 평양의 모습을 언급하며 "상업활동이 굉장히 많아졌다. 김정은 시대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평양 거리에서 연필공장을 봤는데, 주차장에 상업용 택시들이 주차돼있었다"며 "한 사업에서 다른 사업으로 확장하는 일까지 생긴 것이다. 김정은 시대의 큰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실제로 북한은 김정은 집권 이후 장마당 활성화 등을 통해 사실상 민간 역할을 확장시켜왔다. 하지만 비사회주의·반사회주의 척결 기조가 본격화된 지난해부터 장마당으로 대표되는 비공식 부문 '손보기'가 지속되는 양상이다.
코로나19 여파를 계기로 경제 분야 국가 통제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시장화 역행 정책의 장기적 효과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단기적으론 공식 부문 수입 증대 등의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암시장 활성화 등의 역효과를 피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北 관계자들, 평화협정 관련해
하나같이 주한미군 철수 언급"
한편 쉐퍼 전 독일대사는 북한 주요기관 대표자들이 평화협정과 관련해 한목소리로 주한미군 철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했다.
그는 "다양한 북한 기관의 대표자들과 만나 '평화협정에 무엇이 반드시 포함돼야 하느냐'고 물어봤다"며 "그들은 항상 한반도에서의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다. 이따금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거를 언급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지난해 비핵화 조건으로 '타방(상대방)의 많은 변화'를 언급했다며 "해당 표현은 제재완화가 아닌 주한미군 철수를 얘기한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김 부부장은 지난해 7월 발표한 담화에서 "우리는 결코 비핵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며 "조선반도(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행동과 병행하여 타방의 많은 변화, 즉 불가역적인 중대조치들이 동시에 취해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김 부부장은 해당 담화 발표 1년여가 흐른 지난달 10일, 주한미군 철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개인명의 담화에서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한 조선반도 정세를 주기적으로 악화시키는 화근은 절대로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며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