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판매 이원화 논의 확산
소비자에 부담 전가 우려도
국내 은행들 사이에서 금융 상품의 제조와 판매를 분리하는 이른바 제판분리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소비자와의 접점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는 핀테크 업체들이 판매망을 주도하게 되면서, 은행은 여기에 상품을 제공하는 도매상으로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은행과 핀테크 간 제판분리가 현실이 되면 소비자 선택권이 넓어질 수 있겠지만, 복잡해진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이 결국 고객들에게 전가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달 말 진행된 우리금융그룹의 실적발표에서 황원철 부행장은 "핀테크의 시장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금융 분야에서도 제조와 판매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번에 언급된 제판분리는 금융 상품을 만드는 제조사와 이를 파는 판매사가 완전히 구분되는 구도를 일컫는 표현이다. 제조사는 혁신 상품 개발을 비롯해 고객 서비스와 자산운용에 집중하고, 판매 전담 회사는 마케팅에 인프라를 집중해 영업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에서 현재 제판분리가 행해지고 있는 분야는 보험업계로 제한돼 있다. 최근 한화생명과 신한라이프, 미래에셋생명 등 대형 생명보험사들이 판매 자회사를 설립해 영업 조직을 분리하는 식이다.
은행권에서 제판분리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은행이 다루는 상품에 제판분리가 적용된다면 그 핵심은 대출이 될 전망이다. 은행은 대출 상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이를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건 다른 플랫폼이 대신하게 된다는 얘기다.
◆핀테크 약진 속 은행 역할론 '도마'
은행권에서 제판분리 논의가 나오는 배경에는 핀테크들의 약진이 자리하고 있다. 여러 금융사의 대출 금리와 한도 등을 한 눈에 비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한 핀테크 업체들의 영업 방식이 제판분리 중 판매 전문 채널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다.
은행과 핀테크업계 사이에서 제판분리 구조가 형성될 것이란 예상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말 은행권과 학계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은행은 여전히 특별한가'란 논제를 두고 열린 세미나에서는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당시 발제자로 나선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는 "미래에 빅테크는 전자금융업자로 플랫폼을 이용해 개인의 지급결제 및 자산관리 시장을 잠식하고 은행은 소매금융 상품을 빅테크에 공급하는 제조업체 역할을 하며 도매금융 위주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반면 은행 측에서는 의문의 목소리가 나왔다. 같은 세미나에서 한동환 국민은행 디지털금융그룹 부행장은 "은행은 여전히 상품과 서비스를 전달하는 큐레이터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며 "고객에게 맞는 금융 집사로 정서적 완전판매가 이뤄질 때 은행의 특별함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발언했다.
문제는 제판분리로 인해 최종 소비자가 짊어지게 될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에 없던 유통 단계가 추가됨으로써 결국 관련 영업비용이 고객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소비자 권리를 앞세워 시장에 자리를 잡아 보려는 핀테크업계와 기존 구도를 사수하려는 은행들이 제판분리를 두고 대립각을 세우는 가운데, 고객 입장에서 정말 중요한 유통비용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