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최대 판도를 이룩한 건륭제는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했다. 십전은 그의 재위 기간 있었던 10번의 대외 원정을 의미한다. 십전노인이란 이 전쟁 모두를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 마지막 원정이 바로 안남(현재 베트남) 원정이다. 안남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참패였지만, 건륭제는 안남 국왕이 직접 사죄하는 글을 올리고, 자신의 80세 생일에 직접 입조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이유로 이를 정치적 승리로 포장했다.
건륭제의 정치적 승리 선언에도 불구하고, 청 내부는 매우 곪아있었다. 문제는 가장 취약한 지점부터 터졌다. 안남 원정에 사용된 군사비를 양민에게 세금을 걷어 충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관리의 부정부패와 기근까지 더해지면서 양민의 고통이 심각해졌다. 특히 후방 보급을 담당한 사천과 호북 등에 살고 있는 양민의 고통은 더 심각했다.
이처럼 청조는 18세기 말부터 극심한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선 건륭제가 십전노인이라고 자랑하며 확장한 영토는 때문에 국방비 부담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영토 확장은 다양한 민족, 종교 등의 화합하기 어려운 여러 세력을 강압적으로 청의 영향력 아래에 아우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제국으로서 청의 존립은 국가의 정치력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은 대외 원정과 부패한 관리는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뒷받침하기는커녕 오히려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여기에 급격한 인구의 증가와 자연재해, 질병 등은 청의 지배력 약화와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청의 지배력 약화는 청 제국을 통치하는 만주족의 정치력을 근간에서부터 흔들었다.
만주족이 청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만주족만으로 제국이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단적으로 농업 생산량과 직결된 자연재해를 대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리 시설을 관리하고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청조는 사실상 이를 방기하였다. 대표적으로 양쯔강 하류에 위치한 소주의 치수공사는 건륭 35년(1770) 이후 더 이상 정부에 의해 추진되지 않았다. 이후에는 사실상 한인의 기부에 의존했다.
소주 지역의 치수가 상징성을 갖는 이유는 이 지역의 인구와 생산량이 중국 전체 생산량의 절대량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가 이 지역에 대한 치수를 포기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사실상 국가 운영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경제적인 측면을 이미 한인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황제는 만주족이지만,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한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만주족은 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군사적 수단에 의존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강압적 통치는 당연히 반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지에서 만주족의 통치를 거부하고 청의 지배에서 이탈하는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청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 대규모 군대 동원에는 역시 막대한 국가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또다시 한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796년에 일어난 민중 반란은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청의 중국 통치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 청조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9년간 2억 냥에 이르는 전비를 소비했다. 전비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감당하기 위해 수탈이 용이한 지역을 중심으로 세금을 올렸다. 이러한 악순환은 만주족의 중국 통치 구조를 더욱 약화시켰다.
그중 묘족과 백련교도의 고통은 더욱 심했다. 관리들은 이들에게 상습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도적(백련교는 敎匪, 묘족은 苗匪)으로 몰아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능욕했다. 여기에 일부 중국인(漢族)까지 가담해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모함을 당해 관아로 끌려가는 이들 중에는 점차 무장 저항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도 이들을 “모두 민가로서 기근 때문에 소동을 일으켰는데, 자기들 패거리를 백련(白蓮)이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를 교주(敎主)라고 하면서 사악한 방법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고 현혹시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묘족 반란은 호남과 귀주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청조는 여기에 팔기를 비롯한 현지 한인 민병대를 자위대의 형태로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한족과 묘족 간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묘족의 거주지는 일반 거주지와 강제로 구분되었다. 묘족 반란이 길어지면서 점차 청의 지배력이 약해진 지방이 많아졌다.
조선에서 보기에도 청의 상황은 심각했다. “묘비(苗匪)와의 싸움으로 인하여 전후로 운반한 군량이 몇백만 곡(斛)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고, 지난 10월 사이에는 광서 순무 태포(台布)의 상주로 인하여 남녕(南寧) 선화현(宣化縣)의 삼강구(三江口)로부터 백색(百色) 지방에 이르기까지 무려 6백 80리나 되는 길을 장정을 내어 운하 파는 작업을 하면서 날마다 고은(雇銀)을 지급했다고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막대한 전쟁비용이 투입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은 1796년 묘족 반란을 겨우 진압했지만, 이제 백련교의 난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청 정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과 군대를 투입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한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중심에 한족 출신 관료인 증국번, 좌종당, 리홍장 등이 있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