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데이트폭력 주요 소재로 삼은
‘알고있지만’·‘이 구역의 미친X’
최근 멜로드라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가스라이팅, 데이트 폭력이 중심 소재가 되면서 분위기는 다소 무거워졌지만, 이를 한층 성숙하게 다루면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 방송 중인 JTBC 드라마 ‘알고있지만’ 첫 회에서는 주인공 유나비(한소희 분)가 전 남자친구와 이별하는 과정이 그려졌다. 이별 과정의 가장 핵심 원인은 전 남자친구의 ‘가스라이팅’이었다. 드라마는 이 과정을 뭉뚱그려 표현하지 않고 전 남자친구의 어떤 행동이 가스라이팅이고, 이것이 유나비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를 디테일하게 묘사했다.
유나비의 허락도 없이 그의 누드 조각상을 만들어 전시하는 행동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나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전 남자친구의 화법, 이로 인해 결국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유나비 등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도 이를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과정들을 현실적으로 묘사했었다.
하이퍼리얼리즘을 표방하는 드라마였던 만큼, 첫 회부터 마냥 달달하지만은 않은 연애의 이면을 실감나게 묘사하며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었다.
최근 종영한 카카오TV 오리지널 드라마 ‘이 구역의 미친X’ 또한 마냥 달달하기만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었다. 데이트폭력 피해자 이민경(오연서 분)과 노휘오(정우 분)의 연애기를 다루면서, 이민경이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메인 테마로 삼은 것이다.
분노조절이 불가능한 노휘오와 어느 누구와도 교류를 하지 않는 이민경(오연서 분)의 로맨스를 다룬 이 드라마는 자칫 민폐로도 보일 수 있는 이 인물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었다. 특히 데이트 폭력 피해자인 이민경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전 남자친구는 유부남인 사실을 숨긴 채 그를 만났었다. 헤어지자는 이민경에게 폭행을 가하고, 몰래 찍은 영상을 빌미로 그를 괴롭혔다는 사연도 물론 다뤘지만 이로 인해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이민경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더욱 집중했다.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다소 보기 불편할 수 있는 피해자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인물을 향한 이해도를 높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드라마 내에서 남성의 과격한 행동이 낭만적으로 포장되곤 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발전이다.
지난 2016년 방송된 ‘또 오해영’과 ‘함부로 애틋하게’, ‘우리 갑순이’ 등 다수의 드라마들이 폭력적인 장면에 대해 지적을 받았었다. 남자 주인공이 손목을 억지로 끌고 나가거나 벽에 밀친 채 억지로 키스를 하는 장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등 이것이 데이트 폭력의 일환이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트 폭력 피해자는 주변부의 이야기에만 머무르거나 신체적 폭력에 한정됐던 것과 비교해도 훨씬 섬세하고 깊어졌다. 지난 2017년 방송된 ‘청춘시대2’에서는 남자친구에게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당한 정예은(한승연 분)의 아픔과 주변의 왜곡된 시선에 대해 다루며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폭력 장면을 자극적이고 불필요할 만큼 불필요하게 담아 비판을 받았었다.
최근 가스라이팅, 데이트 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각종 시사, 교양프로그램에서 이와 관련된 심각한 범죄들을 다루고 있다. tvN 예능프로그램 ‘알쓸범잡’에서는 연인은 물론, 직장 내, 또 가족 내에서도 가스라이팅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문제를 확장시키기도 했다.
심각성은 커지고 논의의 깊이도 깊어진 만큼, 현실을 반영하는 드라마들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변하고 있다. 누군가는 보기 편하지 않아서, 또 다소 무거워서 피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드라마가 데이트폭력을 조장한다'는 과거를 넘어, 현실을 제대로 담으려는 노력들이 꾸준히 이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