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연구직 이탈을 막아라"…인센티브제 개선 고심
전체 임금 수준보다 '공정한 성과 배분'이 관건
현대자동차그룹이 미래 자동차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고 단순 제조업이 아닌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생산직 위주 임금체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배터리, 로보틱스,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분야 연구개발(R&D) 인력과 신시장 개척을 위한 마케팅 인력을 포함한 다양한 사무·연구직 인력의 수혈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오히려 생산직 노조의 교섭에 따라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임금체계로 인해 사무·연구직 인력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 주력 계열사들은 최근 신입사원이나 저연차 직원들의 잇단 이직으로 인력 공백이 발생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직 기업은 주로 ICT·금융 기업들로, 기존보다 좋은 대우를 받고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한때 취업 ‘선호도 1위 기업’이자 ‘평생직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현대차그룹으로서는 자존심에 생채기가 날 상황이다.
자존심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현대차그룹의 미래를 이끌어야 할 핵심 인력 육성에 차질이 생긴다는 점이다.
인력 이탈 사태 핵심은 '세대 갈등' 아닌 '직군 갈등'
현대차그룹 인력 이탈 사태의 원인을 ‘MZ세대와 기성세대간 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생산직과 사무·연구직간 입장차로 보는 게 맞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현대차와 기아차 등 주력 계열사들은 사내하도급 직원의 정규직 전환에 따른 생산직 인력 증가로 지난 수 년간 생산직 신입사원을 채용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내연기관차의 전기차 전환으로 생산라인에 투입되는 인력 수요가 줄면서 신입사원 채용은 사무·연구직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저연차 직원들이 대부분 사무·연구직으로 구성됨에 따라 이들이 별도의 사무직 노조를 결성하거나 회사를 떠나는 상황이 ‘세대 갈등’으로 오인되고 있지만, 사실상 ‘직군 갈등’인 셈이다.
젊은 사무·연구직 직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임금과 성과급 체계다. 일단 연봉 수준이 다른 대기업들에 비해 낮다. 현대차·기아 신입 사원의 기본급은 지난해 기준 4300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이나 매출 규모가 현대차·기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ICT 기업 초임이 5000만~6000만원대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이탈 직원들을 잡아두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한 관계자는 “지난 3~4년간 실적 악화로 성과급을 깎으면서 실질임금이 1000만원 이상 하락했다”면서 “스펙이 좋은 저연차 사무·연구직 직원들로서는 ICT 기업에 들어간 비슷한 또래들과 비교하면 박탈감이 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생산직 위주의 노조가 이끄는 임금교섭이 사무·연구직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개별 성과를 측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생산직과 달리 사무·연구직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 다른 보상을 받길 원한다.
하지만 노사 교섭 결과에 따라 임금인상률과 성과급이 일괄적으로 적용되니 사무·연구직은 어떤 교섭 결과가 도출돼도 만족하기 힘들다.
최근 사측이 노조에 제안한 기본급 5만원 인상, 성과금 100%+300만원, 격려금 200만원 지급 등에 대해서도 사무직 노조는 “성과금은 합리적 산정 기준을 통해 공정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액수보다도 ‘능력과 성과에 따른 공정한 분배’라는 성과급의 기본 취지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생산직 근로자는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잔업과 특근 등을 통해 임금이 더 높아질 수 있지만 사무·연구직은 그런 부분도 기대할 수 없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한 저연차 직원은 “노력이나 성과와 무관하게 모든 직원들에게 동일한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은 일의 동기 부여나 성취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면서 “생산직 위주의 노조와 별개로 사무직 노조가 출범한 것도 그런 취지가 가장 크다”고 말했다.
이러다 '인재 사관학교' 되나…인력 지켜낼 유인책 한계
현대차그룹 정도의 대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사무·연구직은 인력 시장에서 ‘고급 인재’로 꼽힌다. 그만큼 외부로부터 이직 유혹도 많다.
능력과 경력은 고급인데 기존 받고 있는 연봉은 낮으니 인력을 빼내가기는 최상의 조건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한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직원들이 ICT 기업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러다 현대차그룹이 인력 사관학교 소리를 듣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고 한탄했다.
회사로서는 이들을 지켜내기 위한 유인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임금 체계는 이직이 거의 없고 오히려 구조조정을 해야 할 상황인 생산직들에 맞춰져 있어 대응이 쉽지 않다.
이를테면 R&D 분야 핵심 인력을 지키기 위해 해당 직군의 저연차 직원 연봉을 크게 올리려면, 생산직도 동일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호봉에 따라 단계별로 상승하는 지금의 임금 체계대로라면 연봉 2억짜리 생산직이 탄생할 수도 있다.
좋은 인재를 채용하고 지켜내는 노력을 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셈이다.
최근 현대차그룹 계열사에서 ICT기업으로 이직한 한 직원은 “이직 후 연봉이 획기적으로 크게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연봉이나 성과급 책정에서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개별 성과를 판단해 결정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노력에 따라 더 크게 오를 것이란 기대가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회사측도 '임금·성과급 체제 개편 필요성' 인지…생산직 위주 노조가 관건
회사측도 임금·성과급 체제 개편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3월 16일 직원들과의 ‘타운홀 미팅’ 자리에서 ‘성과 보상에 대한 직원들의 생각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많이 노력해 주신 직원들이 회사에 기여를 한데 비해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 굉장히 죄송스럽게 생각했고,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고 답했다.
정 회장은 ‘성과급 지급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성과에 대해서 공정하고 투명하게 평가를 해, 보상이나 승진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계열사 전체에서 임직원들의 눈높이에 맞춰 좀 더 정교하게 선진화가 돼야 하고, 문제가 있다면 빨리 바꿔서 직원들께서 정말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관건은 역시 노조다. 일괄적인 임금인상과 성과급 지급에 근속 연수에 따른 호봉제로만 개별 차이를 두는 생산직 위주의 노조가 교섭권을 갖고 있어 임금·성과급 체제 개편에 있어 진통이 불가피하다.
성과급의 취지를 살리려면 로보틱스나 UAM 등 미래사업 분야에서 성과가 있을 경우 그 보상을 해당 분야 R&D 부서에만 지급하는 방식이어야 하지만 완성차 생산직 조합원이 대다수인 노조가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사무직과 연구직 성과 인센티브를 어떤 식으로 가져갈지에 대해서는 회사도 고민하고 있다”면서 “개인별 성과를 별도로 평가해 사무직·연구직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책정하는 시스템으로 가는 게 맞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