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이 외교부에 보낸 중재 공문, 업계엔 공공연한 사실로
폭스바겐, 겉은 '덤덤' 속은 '전전긍긍'…보조금 혜택 날아갈 위기
세계 최대 자동차업체인 폭스바겐이 전기차 장기 계획에서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구매를 중단할 것이 유력해지면서 K배터리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LG와 SK가 소모적인 분쟁을 계속하는 사이 경쟁력 하락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 폭스바겐이 양사 갈등으로 전기차 생산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을 우려해 외교부에 "분쟁 해결에 나서달라"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며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요청 수락 여부를 넘어서 정부가 사실 자체를 함구한 것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폭스바겐이 LG, SK 양사 갈등을 풀어나갈 해법을 범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한 것과 달리, 우리 정부는 현재 "기업들끼리 분쟁이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모양새다.
배터리업계에서는 '폭스바겐 서한'이 이미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폭스바겐이 외교부에 보낸 서한에는 '양사 소송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한국산 배터리 대신 중국산 배터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취지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전해졌다.
업계 한 관계자는 "폭스바겐이 우리나라 기업도 아니고 쉬쉬할 사안도 아닌데 정부가 공문 수신 진위 여부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의혹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가 서한을 받았다는 간접적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폭스바겐 속은 '전전긍긍'…美 시장 진출 성패 가르는 보조금 혜택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9.8GWh급 배터리1공장은 폭스바겐 전기차용 배터리 공급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이 공장은 당장 내년부터 상업 생산에 들어갈 계획인데 전기차 25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폭스바겐은 이곳에서 생산된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2023년경부터 공급할 예정이었지만 최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판결로 사업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ITC는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과 모듈, 팩 및 관련 부품·소재에 대해 미국 관세법 337조를 위반했다고 보고 '10년 동안 미국 내 수입 금지'를 명령했다. ITC가 미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1공장에 2년 유예기간을 주고 제한적 공급을 허용했지만 사실상 이 공장은 폐쇄 수순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인 폭스바겐은 이번 사태에 담담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전기차에 대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품인 배터리 수급을 위해 '멀티 서플라이 전략'을 펴고 있기 때문에 양사 분쟁이 폭스바겐이 당면한 난제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폭스바겐그룹 관계자는 "LG, SK, 삼성뿐만 아니라 CATL 등 해외 배터리사와의 합작을 고려하는 등 전기차 배터리 수급처를 다변화하고 있다"며 "그룹에서는 유럽에서 향후 10년 내 240GWh의 총 생산량을 갖춘 기가팩토리 6곳을 구축하는 등 자체생산 계획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배터리업계의 관점은 사뭇 다르다. 바이든 당선으로 전기차 시장의 급격한 성장이 예고된 미국에서 배터리 공급처를 한순간에 잃게 될 문제라는 게 핵심이다. 폭스바겐이 대외적으로 밝힌 담담한 입장과 달리 속으론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업계는 바이든 정부가 2년 내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발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바이든이 미국 영토 내에서 생산된 부품에만 보조금 혜택을 주는 정책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폭스바겐에 공급될 예정이었던 SK의 배터리1공장이 폐쇄되면 미국 내 전기차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나게 되는 건 자명하다.
전기차업계 관계자는 "테슬라가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 영역 안으로 들어오려고 차 가격을 1000만원씩 내리기도 했다"며 "그만큼 초기 시장에서는 보조금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행정명령을 내리며 예고편을 보여줬다. 미국 정부가 관용차 등 300만대를 모두 전기차로 바꿀 계획인데, 구입하는 차량 부품의 50% 이상을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미국 내에서 생산된 배터리 등 부품을 이용한 전기차업체들에 혜택이 예고된 것이다.
폭스바겐이 ITC 재판 절차 중 "PI(Public Interest, 공공이익) 측면에서 SK의 9.8GWh급 배터리1공장이 중요하다"고 호소한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폭스바겐이 그만큼 미국 내 배터리 생산 공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폭스바겐의 주장대로 배터리 수급처를 다변화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면서도 "다만 기존 미국 내 공장 이외 다른 국가에서 배터리를 수입하게 되면 가격 상승은 물론 배터리 검증 및 인증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하는 커다란 핸디캡을 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