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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⑳] 전쟁 도구로 전락한 사람들…일본군‘위안부’가 보여주는 일제의 민낯


입력 2021.03.16 14:00 수정 2021.03.16 17:59        데스크 (desk@dailian.co.kr)

1944년 8월 14일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는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위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연합군에 대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이로써 수년간 이어진 일제의 침략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아직 연합군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이었고, 일본 영토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루어진 선제적인 항복이었다. 일본 군 내부에서는 제대로 전황을 파악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마지막까지 결전을 꿈꾸며 쿠데타를 모의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선제적인 이 항복으로 자국 영토가 전쟁터가 되는 상황만은 벗어날 수 있었다.


일제의 침략 전쟁으로 아시아 각 국에 남겨진 피해는 매우 심각했다. 이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농촌 지역보다 도시 지역의 피해가 컸다. 전쟁 전 도쿄 인구는 700만 명 수준이었지만, 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농촌 등 주변 지역으로 피란 가면서 200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도쿄를 포함한 주요 도시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남아 있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파괴됐고, 인류가 처음 사용한 핵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나가사키 등은 사실상 초토화되었다. 일본에 처음 상륙한 미군은 당시 일본의 도시 풍경을 ‘끝도 없이 펼쳐진 벽돌 조각의 평원’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영토는 전쟁의 참상은 피할 수 있었다. 일본의 최남단인 오키나와나 중국 동북지역 등이 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것에 비하면 일본은 사실상 주요 도시 이외 지역은 직접적인 전쟁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를 방어한다는 구실 하에 기지화 되었고, 미군과의 전투가 벌어지면서 전체 인구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거나 자살하거나 혹은 실종됐다. 심지어 일본군은 류큐에서 남학생에게는 미군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자살 공격을 강요했고, 여학생은 간호사로 동원했다. 일본군이 동원한 남녀 학생 중 확인된 사망자만 약 2000여 명 이상이었다. 이런 참상은 일제가 오키나와를 전쟁터로 삼으면서 만들어낸 고의적인 비극의 극히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연합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로 죽음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1945년 7월 2일 오키나와가 연합군에게 함락되면서 연합군의 일본 상륙은 목전에 이르렀다. 그리고 원자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지면서 일본은 항복했다. 무조건적인 항복이었다. 이후 100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이 일본에 주둔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주둔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가장 손쉬운 자원을 동원하고자 했다. 이러한 준비는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일본에 상륙하기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이 직접 지역의 창기 등을 동원해 이른바 ‘접대’를 준비했다. 이때 경찰이 창기에게 부여한 임무는 이른바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기 위한 총알받이’였다.


이렇듯 일본에서 여성을 미군 접객 여성, 이른바 ‘위안부’로 동원한 것은 일본 위정자뿐 아니라 일본인 스스로 여성을 다른 자원보다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하나의 인적 자원으로 인식한 결과였다. 많은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살펴보면 당시 일제가 군 ‘위안부’의 동원 목적을 군인의 전쟁 스트레스 해소에 두고 이를 장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인다.


당시 각국은 전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은 일요일 주요 방송에서 사라진 위문 열차와 같은 공연은 물론 설탕과 초콜릿 같은 기호품 역시 훌륭한 전쟁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되었다. 설탕이나 초콜릿 등은 뇌 속에서 도파민을 활성화해 행복감을 느끼면서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해소했다. 흔히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당분을 찾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담배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르핀 등과 같은 마약류도 전쟁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수단으로 흔히 사용됐다. 영화 ‘고지전’에서 중대장이 전쟁 스트레스에서 도피하기 위해 사용한 약물 역시 이 모르핀이다. 영화에서처럼 그 누구도 그의 모르핀 남용에 대해 제지하지 않았다. 새로 전입한 장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극단에 몰려있는 군에서는 기호식품 등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경우 보다 강한 약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실 미군 하면 연상되는 것 중 하나가 초콜릿과 코카콜라인데, 코카콜라는 음료수에 코카인을 넣은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물론 지금은 코카인의 유해성 때문에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는 코카인의 중독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생겨난 참극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도 군인 대다수가 코카인 중독자였다. 이런 맥락에서 코카인 성분을 첨가한 코카콜라는 군인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음료였고, 군인들에게 초콜릿 등과 더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물자로 자리매김했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프로이트 역시 코카인 예찬론자였다. 그는 코카인이 유쾌함과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만병통치약이라고 극찬했다. 심지어 그는 이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고, 환자들에게 약으로 처방하기도 했다. 이처럼 설탕, 초콜릿, 담배, 코카인 등은 군인이 전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주요 자원으로 활용됐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간을 전쟁 도구로 여기는 근대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받는 전장 스트레스는 어찌보면 당연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초콜릿과 심지어 코카인 같은 마약류까지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일말의 저항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 최소한 전쟁 스트레스를 극복한다는 미명 하에 또 다른 인간을 도구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저항선을 넘어서까지 전쟁을 이어갈 수는 없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저항선마저 없었다. 1930년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제반 물자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를 테면 당시 일본은 주로 대만에서 설탕을 들여왔는데, 설탕 수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전시 미곡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대만에서 작물 생산 정책을 설탕과 쌀 이중 생산 정책에서 쌀 중심으로 변경한 결과였다. 일본이 수입하는 설탕의 대부분을 공급하던 대만에서 더 이상 설탕을 생산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른 기호식품의 생산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고 각종 의약품의 수급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개시하는 시점부터 배급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본에서 당시까지 여성은 주요 동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주로 가정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면서 농업과 경공업 등에 종사했다. 여성을 군인으로 동원한 소련이나, 각종 중공업에 적극적으로 여성을 투입한 서구 국가의 여성 인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여성의 사회 활동은 ‘여급’, ‘접객’ 등에 집중됐다. 물론 전시체제를 맞아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하면서 여성 역시 광산, 군수공장 등에 동원하였지만, 상당수는 남성의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 그 결과 일제는 여성, 특히 식민지 여성을 ‘잉여 자원’으로 인식하였고, 전시 ‘잉여 자원’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별다른 죄의식 없이 조선 여성을 비롯해 중국 여성, 심지어 자국 여성까지 군 ‘위안부’로 동원했다. 그들에게 여성은 당시 가장 동원하기 손쉬운 자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 자국 여성을 ‘접대’라는 미명 아래 연합군에게 기꺼이 제공하고자 공권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논문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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