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역사학계에서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하버드 대학의 존 마크 램지어(John Mark Ramseyer) 교수가 2020년 ‘국제 법경제 리뷰’(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에 투고한 논문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한국인 위안부는 계약관계로서 성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에 대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각계에서 비판이 이어졌다.
램지어 교수에 대한 초기 비판은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Mitsubishi Professor of Japanese Legal Studies)’라는 그의 직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미쓰비시에서 하버드 대학에 제공한 연구기금으로 조성한 자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비판의 핵심은 연구기금을 제공한 미쓰비시가 일제의 침략 전쟁 당시에 일본군에 군수 물자를 공급하면서 성장한 기업이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이런 기업에서 연구기금을 후원받은 교수는 해당 기업의 이미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실제 램지어 교수가 쓴 일본군‘위안부’ 관련 논문 및 기고문 등을 살펴보면 이러한 비판이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이 나오기 시작한 1991년에도 일본의 예·창기 계약관계에 대한 논문을 투고하고, 위안부의 피해를 부정하는 데 동조했다. 그러다 결국 이번에 문제의 논문을 ‘국제 법경제 리뷰’에 투고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제국의 후예’를 쓴 카터 에커트를 비롯한 많은 한국사 연구자의 비판이 이어지면서 그의 논문이 갖는 학술적 오류가 본격적으로 문제시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램지어 교수의 전공이 일본 회사법 및 법 경제학이라서 생긴, 한국사에 대한 몰이해가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한국사 연구자들은 그가 논문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근거로 사용한 각종 자료의 출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의 주장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00여 년 전과 지금은 많은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당시 시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시 상황을 재현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은 우리 일상생활부터 세계질서까지 많은 것들에 크고 작은 변화들을 가져다줬다. 단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를 기준으로 100여 년 전 상황을 이해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그러므로 에커트 등 한국사 연구자들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논의에 앞서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우리와 일본 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램지어 교수는 일본군‘위안부’, 특히 한국인은 일본인과 유사한 ‘계약적 관계’로서 자발적으로 일본군을 따라다녔다고 주장했다. 즉, 한국인 일본군‘위안부’는 자기 의지에 따른 계약관계이기에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이전에 일본군‘위안부’의 경우 그 전제가 될 수 있는 ‘인신매매’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근본적인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미 국무부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 각국의 인권실태 보고서이다. 여기서는 미국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법(Trafficking Victims Protection Act)의 충족 여부에 따라 세계 각국의 인권실태를 분류하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2010년대 이후로 그 기준을 모두 충족해 1등급을 유지하는 반면 일본은 그 기준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해 2등급 국가로 분류되어 있다. 함께 2등급 국가로 분류된 나라에는 앙골라, 에콰도르, 이집트, 엘살바도르, 자메이카, 케냐, 멕시코 등이 있다. 미 국무성 보고서는 일본의 경우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인신매매 금지’ 법안을 마련하고, 관련 국제 협약 등에 참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미 국무성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일본은 여전히 일본 국내법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현재 우리의 기준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00여 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이러한 인식은 당시 일본 법원의 판례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 포주를 상대로 두 여성이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한 여성은 승소해 해방되었고, 또 다른 여성은 패소하여 포주에게 속박 관계를 계속 유지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동일한 처지에 있던 두 여성에게 상반된 판례가 내려진 것은 포주가 돈을 누구에게 주었는가 하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포주가 여성을 사오는 대가로 그 아비에게 돈을 줬던 첫 번째 여성은 ‘인신매매 금지법’에 따라 해방 대상이 되었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포주가 여성에게 직접 돈을 주었기 때문에 약정한 계약이 종료되기 전까지 계약관계가 계속 유지된다고 본 것이다. 두 번째 사례를 보면 당시 일본 법원은 여성의 인권보다 계약관계를 더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와 일본 간에는 법률 개념상 많은 차이가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램지어 교수의 주장 또한 일본 국내법 전공자로서 일본 내 ‘인신매매’ 관련 법률의 개념을 적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램지어 교수에 대한 보다 정확한 비판을 위해서는, 우선 그가 어떤 법률적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는지 보다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절차가 생략된 비판은 자칫 상대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엇을 비판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보다 강하게 말하면, ‘과연 일제 지배하의 조선인에게 권리가 존재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윤치호일기’를 살펴보면 일본인에게 집을 빌려주면서 계약서까지 썼지만,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윤치호는 당대 조선인 유력자 중에 한 명이었다. 그조차 일본인을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다.
사실 램지어 교수의 주장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논의라도 전제 자체가 잘못된 상태라면 이후의 논의는 사실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따라 주변 국가를 침략하고자 마음먹고, 결국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상황에서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약속이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즉 계약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침략 정책을 공식화한 것은 1890년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일본 의회에서 ‘이익선’을 주장한 이후부터였다. 야마가타가 주장한 이익선이란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선언이었고, 이러한 지배 상태는 일본이 조선과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갖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일본에게 이러한 지위가 필요한 것은 조선을 일본의 울타리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국인에 대한 약속은 사실 일본이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로마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전쟁 중에 법은 침묵한다(Silent leges inter arma)’. 일본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일제 강점기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일제 지배하의 조선 여성에게 정상적인 계약과 그에 따른 권리가 존재했을까? 침묵이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