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법부 소관'이란 명분으로
선박 나포 문제 '정부 불개입' 원칙 고수
동결된 원유 결제 대금 문제 해결만 촉구
한국, '투트랙' 대일외교 전략과 닮은꼴
이란이 한국에 묶여있는 약 8조원 규모의 원유 대금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한편 환경오염을 이유로 나포한 한국 선박의 '사법절차'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한국이 한일관계에 있어 경제 이슈와 별개로 강제징용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사법부 판단 존중"이라는 '투트랙 전략'을 고수해왔듯, 이란 역시 같은 방식으로 한국을 대하는 모양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12일 정례브리핑에서 "우리 정부는 현지 파견된 정부 대표단을 포함해 우리 선박·선원이 최대한 빨리 억류 해제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최 대변인은 "현 단계에서 구체적인 (억류 해제) 시기는 예단하기 어렵다"며 "하루빨리 억류 해제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외교부에 따르면, 이란 현지를 방문 중인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지난 10일 이후 △압박스 아락치 외교부 차관 △모하마드 레자 샤네사즈 보건부 차관 겸 식약처장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교부 장관 △카말 하르라지 최고지도자 외교고문 △압돌나세르 헤마티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연이어 만났지만, 선박 나포 문제 해결에 '진전'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다.
최 차관은 면담 때마다 선박 및 선원에 대한 억류 해제를 요구하며 억류 근거가 된 '기술적인 요인', 즉 환경오염과 관련한 증거자료를 조속히 제출해줄 것을 언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란 측은 해당 사건이 사법부 소관이라며 "정치화해선 안 된다"는 입장만 반복하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이란 반관영 매체인 '메흐르 통신'에 따르면, 자리프 외무장관은 최 차관과의 면담에서 선박 나포 사건이 "사법적 규제의 틀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술적 문제"라며 "당연히 이란 정부는 사법 절차에 개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란 측은 선박 나포 문제와 별개로 한국 은행들에 동결된 이란산 원유 대금 문제 해결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헴마티 중앙은행 총재는 최 차관 면전에서 원유 대금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며 공개 압박에 나서기도 했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사법부 불개입'이라는 외교 원칙을 강조해온 터라 이란에 '외교적 타협'을 촉구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문 정부는 지난 8일 위안부 피해자 승소 판결과 관련해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일본 측은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한국 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해당 소송 결과에 크게 반발했다. 주권 국가는 다른 나라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국제법상 '주권 면제'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문 정부는 강제징용 판결과 마찬가지로 '사법부 영역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며 '외교적 접근'에 선을 긋고 있다. 이에 따라 강경화 외교부 장관 역시 유선으로 유감을 표한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에게 '접점 모색' 아닌 '일본 측의 과도한 반응 자제'를 주문했을 뿐이다.
일각에선 원유 대금 이슈가 미국의 대이란 제재 영향으로 불거진 만큼 미국 중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미국이 정권 이양기를 맞은 데다 의회 점거 사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 소추 등 '내부 이슈'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큰 기대를 하긴 어렵다는 평가다.
결국 이렇다 할 '뾰족수'가 없는 상황에선 사태 장기화에 대비하며 대응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이란 정부는 선박 억류와 동결 대금 문제가 별개라는 입장이지만, 분명 두 사안은 연계돼있다"며 "동결 자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억류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외교부 1차관 출신인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은 앞서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남긴 글에서 "조속한 해결을 추진하되 장기화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며 "협상 시 선박과 선원을 분리해 접근하고, 억류된 분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우선 주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 의원은 "이란 측에 우리가 장기화에도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줘야 한다"며 "그래야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이란 측이 협조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 사례나 국제법을 따져 억류자 석방에 호응하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며 "국제여론을 동원해 인도적 요구에 불응하는 데 대한 비판여론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