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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⑩] 하나의 사건, 두 가지 시선 : 전쟁의 승리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입력 2021.01.05 15:02 수정 2021.01.06 11:48        데스크 (desk@dailian.co.kr)

베이징을 향해 공격하는 프랑스군ⓒ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60. 12. 22)

새해가 밝았다. 이맘때는 누구나 새해 희망을 떠올려보고, 신발 끈을 다시 한번 고쳐매는 것 같다.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조선의 위정자들 역시 그러했다.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는 군사력이 압도적인 적이 아니라, 잘 모르는 적이다. 한말 이양선을 타고 ‘미친개’(‘고종실록’의 표현에 따르면)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서구 열강이 그러했다.


조선은, 이양선을 타고 온 서구 열강이 너무 강해 1860년 청과 서구 열강 간의 전쟁에서 청 황제가 베이징을 버리고 피란을 할 정도라고 전해 들었다. 그래서 1866년 8월 갑자기 서울 인근에 이양선이 나타났을 때, 많은 이들이 공포에 휩싸여 서울을 버리고 피란했다. 심지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이들까지 생길 정도로 그 공포는 심각했다.


조선은 될 수 있으면 양이와 싸우지 않기 위해 9월에 서울 인근까지 올라온 이양선에 한우까지 보내며 달래어 충돌을 피했다. 그런데 10월에 양이가 국왕에게 죄를 묻겠다며 강화도를 기습적으로 점령하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양이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까지 그 화가 미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조선군이 만난 양이는 충분히 상대할만했다. 읍마다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는 산성에 의지해 싸운다면 지방 포수만으로도 충분했다. 단지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 할 수 있다는 것을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전투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조선에게 더 이상 이양선과 이를 타고 온 양이는 미지의 존재도 두려움의 존재도 아니었다. 물론 바다에서 조선의 군선으로 이양선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지만, 이양선이 우리 하천에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랐다. 못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 공격하면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그들이 상륙한다 해도 산성을 의지해 싸우면 충분했다. 조선 각지에서 이러한 내용의 대응책이 앞다투어 상소로 올라왔다. 조선 정부는 강화도의 승전보와 함께 이러한 내용을 청과 주변국인 일본에까지 알렸다.


청으로 떠난 조선 사신은 거치는 청국 관아마다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었다. 한강 하구의 강화도를 양이가 침구(侵寇)하여 많은 백성이 다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겸허히 인정했다. 잠시나마 강화도를 빼앗기면서 여기에 보관 중이던 보물 일부를 양이가 노략질했고, 그들이 이를 두고 조선에서 획득한 전리품이라고 떠벌리고 있다고 사건의 전모를 알렸다. 중요한 것은 조선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양이 중 많은 수를 죽였고, 나머지는 강제로 다시 배에 태워 멀리 몰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보따리의 핵심은 전쟁에서 많은 땅을 서양에 빼앗긴 청과 달리 조선은 양이에게 단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청과 일본에서 보기에 강화도에서 조선의 승리는 군사적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 다른 서구 열강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동북아시아 전략은 인도차이나반도가 중심이기에 강화도에 군대를 집중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에서는 그 정치적 의미가 사뭇 달랐다. 우선 1860년 제2차 중영전쟁 이후 청과 프랑스 간에 체결한 조약에서 거론하고 있는 선교사의 전교를 허용하는 것과 이를 보장하는 것의 차이가 병인양요로 분명해졌다. 전교의 자유를 조약에 포함하면서 프랑스는 청 정부를 상대로 선교사의 안전을 청 정부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청 정부는 조약에 따라 전교는 허용하겠지만, 그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그 한계를 분명히 했다. 선교사의 안전은 각국에서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일본 역시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병인양요 직전인 1863년 조슈번을 중심으로 시모노세키해협을 봉쇄하면서 서구 열강과 전쟁이 일어났다. 죠슈번의 시모노세키해협 봉쇄는 초기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선박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한때 승리한 듯 보였다. 하지만 서구 열강이 연합군을 편성한 후 1864년 시모노세키를 점령하면서 패배했다.


이는 분명 조선의 과시였다. 이미 양이와 교류하고 있는 일본에 양이를 승리했다는 것과 이를 주의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과시임 셈이었다. 이처럼 병인양요는 1860년대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일어난 결과이며, 당시 조선의 승리는 각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프랑스의 조선 침략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서구 열강에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이 서구 열강의 군사력을 잘 모르듯, 서구 열강 역시 조선의 군사력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동안 조선이 유원지의(柔遠之意 : 멀리서 온 사람에게 예로 대하다) 정책으로 열강과 충돌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서구 열강의 군함 한 척이 한강을 따라 서울에 올라가서 대포 한 방만 쏘면 조선 정부가 굴복하리라 생각할 정도로 서구 열강의 무지는 심각했다.


그렇기에 병인양요 초기 프랑스 로즈 제독은 조선의 실상을 직접 확인하고자 포함을 이끌고 조선의 해안과 한강을 정찰했다. 이 과정에서 로즈 제독은 서구 열강 사이에 떠돌고 있는 조선에 대한 소문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 첫 난관은 믿을 수 없는 조수간만의 차였다. 그는 황해의 조차가 크다는 것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를 고려해 수심이 14미터 이상인 곳을 정박지로 삼았지만, 썰물에 수심이 4미터까지 내려가면서 좌초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에 흘수(吃水 : 수면에서 배의 최하부까지의 수직 거리)가 낮은 배로 정찰을 계속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강 하구에서 서울 인근의 나루터까지 이어진 조선 선박 행렬, 일종의 교통체증으로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수많은 모래톱과 섬이었다.(지금은 상당수 정리되고 여의도와 밤섬 등이 남아있다) 이런 모래톱에 걸리면 타고 온 배는 좌초되기에 십상이었다. 모래톱이 없는 곳은 조선 선박이 늘어서 있어 이를 피해가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로즈 제독이 한강을 직접 정찰하면서 확인한 것은 군함 한 척으로 조선 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은 헛소문일 뿐이며, 오히려 한강에서 조선의 선박 행렬 혹은 모래톱 등에 좌초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작전 목표를 강화도로 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다행이라면 그가 한강 정찰 중에 만난 조선군은 극히 약해 보이는 군대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정찰 결과를 토대로 강화도를 점령해 한강을 봉쇄한다면 조선 정부에 충분히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청과 일본 등에 있는 프랑스 군함을 모아 조선으로 향했다.


프랑스군의 강화도 점령은 조선의 유원지의 정책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조선 관리는 여전히 먹을 것 등을 주어 돌려보낼 생각이었지만, 그 사이 프랑스군은 갑곶진에 상륙해 강화읍성을 점령하고 한강을 봉쇄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에서 데려온 통역사가 조선에서 보낸 경고 서신을 회담하자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여 조선 사신을 기다리다, 강화도 맞은편의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그가 데려온 군대만으로는 강화도의 모든 지점을 방어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정족산성의 조선군을 몰아내는 데 실패하자, 그는 조선군의 추격이 주춤한 사이를 틈타 약탈한 물자를 가지고 강화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로즈 제독이 중국에 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많은 질책이었다. 특히 그가 명분으로 삼았던 선교사의 안전을 더는 조선에 요구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분명했다. 당시 재중 프랑스 임시 대리 대사였던 벨로뎃(M. de Bellonet)은 로즈 제독이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강화도 원정이 사실상 실패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은 물론 청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교사의 희생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벨로뎃과 로즈 등은 문책성 인사로 좌천되었다. 로즈의 경우 이후 보불전쟁에서 전공을 거두면서 일부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벨로뎃은 좌천된 이후 그 행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만큼 치명적인 패배였다.


이처럼 병인양요는 그 다음해 이루어진 미해병대의 포모사 원정 실패와 함께 동북아시아 각국에게 홈그라운드의 국지적 우세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시킨 전쟁으로 남았다. 클라우제비츠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며, 결국 승리한 전쟁이란 정치적 결과에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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