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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⑧] 하나의 사건, 두 가지 시선 : 역사가와 작가가 하는 일


입력 2020.12.22 13:12 수정 2020.12.22 13:13        데스크 (desk@dailian.co.kr)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그린 한강 수로 지도ⓒ프랑스 국립도서관 디지털도서관 갈리카

하나의 사건에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특히 전쟁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덕분에 당시에 남겨진 기록도 당사자의 입장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역사가가 하는 일 중 하나는 이러한 기록을 재구성하여, 당시 상황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역사가가 보여준 것을 바탕으로 다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가는 역사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역사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한다. 올해 방영된 드라마인 ‘바람과 구름과 비’(TV조선)는 1970년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이병주 작가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동일한 원작의 드라마가 이미 KBS에서 30여 년 전에 50부작으로 제작되어 방영된 적이 있다.


2020년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등장인물들은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서구와 교류하여 영세중립국을 주장하고, 이하응(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주장한다. 어쩌면 작가는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원인이고, 영세중립국이 그 대안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럼 역사 속의 병인양요는 어떤 모습일까? 흔히 한국사에서 병인양요는 1866년 8월 18일 두 척의 배가 도성 인근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배는 모양이 조선 배와 달라 말 그대로 다른 모양의 배라는 뜻인 ‘이양선’이라 불렸다. 이양선은 이전부터 조선 인근에 출몰했는데, 실록에는 중종 때부터 그 기록이 있고, 헌종 때는 셀 수 없이 많아졌다고 나온다.


병인양요 당시에는 이양선을 ‘미친 개’에 비유하며, 빨리 왔다가 달아나기에 그 내막을 알기 어렵다고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양선의 접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동안 조선은 이양선을 상대함에 있어 유원지의(柔遠之意)로 대응했다. 옛말에 이르기를(<中庸>) 멀리서 온 이들에게 베풀면, 오랑캐도 복종할 것이라고 했기에, 이양선을 타고 온 서양인에게 나름의 예의를 갖춰 대접하였다. 난파한 이양선은 선원을 구해주기도 했고, 먹을 것이 필요하면 없는 살림에 닭이라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양선을 타고 온 서양인은 조선에서 노략질을 하거나 통상을 요구하였고, 심지어 철종 대에는 서양인이 당시 ‘천조국’이라 불리던 청의 수도를 점령하여 황제가 열하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서울에 살던 이들은 이 소식을 듣고 서양인이 청에 이어 조선까지 공격할 수 있다 우려하여 관직까지 버리고 낙향하거나, 일명 ‘동막골’을 찾아 산중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런 염려와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병인년에 서양인이 이양선을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까지 온 것이다. 당연히 서울은 공포로 뒤덮였고, 서울에 살던 많은 이들이 피난을 떠났다. 서울을 지켜야 하는 장정까지 피난을 떠나자, 조선 조정은 성문을 막고 부녀자만 떠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피난을 가려고 부녀자로 꾸미고, 가마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조선 정부는 한강을 중심으로 군대를 배치하고, 상륙할 수 있는 곳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천조국’인 청나라조차 바다에서는 이양선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었다. 바다에서 싸우면 승산이 희박하니, 서양인이 육지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서울이 아니라 강화도를 공격했고, 결국 9월 7일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당시 실록에서는 ‘강화도를 빼앗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9월 10일 강화도 건너편의 통진(지금의 김포)에 조선군이 진을 치고, 16일에는 안성에서 출발한 포수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의병들이 도착하였다. 18일에는 문수산성을 침입한 서양인을 막아냈고, 10월 1일에는 양헌수가 야음을 틈타 강화도에 잠입하여 정족산성을 점령했다. 10월 3일 양헌수는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으로 접근하자, 매복하여 프랑스군의 허를 찌르고자 하였다. 이 계획이 성공하여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고, 결국 10월 5일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하였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병인양요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사의 보여준 큰 줄기를 따르고 있지만, 몇 가지 양념을 추가했다. 양헌수가 야간에 강화도에 잠입하여 정족산성을 점령한 것은 앞날을 예견하는 주인공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여기서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의 허구성을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식의 스토리텔링이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라는 표현은 1992년 6차 교육과정부터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바뀐다.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문호개방은 늦어졌지만, 일본처럼 ‘쇄국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는 역사가의 연구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2020년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다. 7차 교육과정에서는 그마저도 대원군의 정책이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했지만,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대원군의 권력욕으로 말미암아 조선이 서구 문물과 천주교를 탄압했다는 드라마상의 전개와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2020년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병인양요의 개전에 대해서도 프랑스군이 이양선 3척을 이끌고 와서 강화도를 점령한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8월에 프랑스군이 정찰을 위해 이양선 3척을 이끌고 온 것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9월에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군함 7척을 이끌고 왔다.


프랑스는 당시 조선에서 프랑스에 협조할 수 있는 적임자가 대원군이라고 잘못 판단했고, 대원군을 왕위에 올리고 고종을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로즈 제독은 군함을 이끌고 조선에 도착하면 천주교인이 들고일어나 호응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각지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모여들었다. 양헌수가 강화도에 잠입할 당시 그를 따르던 군사 중 절반 이상이 각지에서 모여든 향포수였다. 그리고 그를 돕기 위해 뒤따른 이들 역시 평양유격장 최경선이 이끌던 관서지방 포수였다. 수천 년 동안 함께 살아온 이들의 공동체 의식을 너무 얕본 것이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의 패배 이후 강화도에서 철수하였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패배의 원인을 낡은 군함 탓으로 돌렸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이유에 대해서도 우리의 시선과 프랑스의 시선 사이에 차이가 있다. 프랑스에서 병인양요는 ‘“L'expédition de Corée 1866’(1866년 조선원정)이라고 불린다. 다음 주에는 프랑스의 시선으로 1866년 조선원정을 바라보고자 한다.(하편에서)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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