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청문회에 '반올림·한진해운 사태' 뜬금포
"경영자 자격 없다", "머리 굴리지 마라" 인격 모독도 여전
"전경련 탈퇴 '네'라고 대답해라" 억지 강요도
최순실, 최순득, 우병우 등 핵심 증인들로부터 출석을 거부당한 국회의원들은 대기업 총수들에게 칼날을 겨눴다. 기업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인지라 최순실처럼 막 나가지 못하는 대기업 총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증인으로 출석해 고스란히 칼날을 받아야 했다.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는 과거 국정조사나 국정감사에서 늘상 벌어져 왔던 ‘호통치기’와 ‘윽박지르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청문회 취지는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이었지만 반올림, 갤럭시노트7, 한진해운 사태 등 이와 상관없는 이슈들을 들고 나와 대기업 총수들을 윽박지르거나 과거사를 들먹이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의원들도 상당수였다.
이날 국회의원들의 질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중됐다. 그만큼 국회의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면박을 받은 것도 이 부회장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삼성이 받고 있는 핵심 의혹은 최 씨의 딸인 정유라 씨의 말 구입비 등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국민연금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하는 소위 ‘뒷거래’가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이 부회장은 정 씨에 대한 지원이 부적절했다고 인정하며 사과했지만 추가로 이어지는 엉뚱한 질문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삼성반도체 피해자들의 모임인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을 언급하면서 “삼성은 조정위에서 공익재단 1000억원을 조성해 반도체노동자 백혈병 피해자들의 사과, 보상,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해달라는 요구에 개별적으로 사과하고 개별적으로 보상하고 개별적으로 재발방지대책만 내놨다”고 질타했다.
이어 "삼성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피해자에게 처음에 500만원의 피해보상액을 내놨다”면서 “그런 삼성이 전경련을 통해 어버이연합에 수업원을 지원했다”고 언급한 뒤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박 의원은 반올림 외에도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과정에서의 의혹과 메르스 사태 당시 이재용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던 과거 사례까지 들춰냈다.
정의당 윤소하 의원도 삼성반도체 공장 사망 직원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지난 6월 서비스센터 협력업체가 에어컨 실외기 작업을 하다 사망한 사건까지 언급했다.
이종구 새누리당 의원은 2008년 삼성의 차명계좌 사건을 ‘치욕의 날’이라고 언급한 뒤, 당시 이건희 회장이 차명계좌 실명전환 및 세금납부 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한 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빨리 약속을 지키라고 이 부회장을 압박했다. 당시 해체를 약속했던 전략기획실도 미래전략실로 전환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진해운 사태’도 뜬금없는 이슈 중 하나로 등장했다. 정유섭 새누리당 의원은 조양호 회장에게 “조 회장의 판단 잘못으로 한진해운이 공중 분해돼 수천명의 한진해운 직원들과 수만명의 관련업계 직원들이 실업자가 됐다”면서 “기업 오너로서 무책임하게, 너무 쉽게 법정관리 신청을 했다”고 비난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증권을 팔아서 현대상선을 살리고 경영권을 포기한 사례까지 언급했다.
이종구 새누리당 의원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롯데가 한국 기업이냐, 일본 기업이냐”는 이날 청문회 목적과 동떨어진 진부한 질문을 던졌다.
일부 의원들은 대기업들의 해외 투자 확대 추세를 지적하며 국내 투자를 늘릴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도 이어졌다.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이재용 부회장의 답변이 늦어지자 “대 삼성의 총수 아닌가, 글로벌 무대에 나가서도 그렇게 답변하느냐”고 면박을 줬다. 김 의원은 또 추가 질의에서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삼성전자 면접시험에서 낙방할 것”이라며 재차 모욕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유라 씨 지원 자금을 누가 결제했는지 모른다는 이 부회장의 대답에 “이런 부회장에게 국민이 믿고 삼성 경영을 맡길 수 있겠느냐”면서 “이재용 부회장은 기억력이 안 좋은 것 같다. 이 부회장보다 기억력이 좋은 전문경영인에게 넘기는 게 낫겠다는 문자까지 받았다”고 면박을 줬다.
이 부회장이 “저보다 훌륭한 분이 있으면 경영권을 넘기겠다”고 답하자 박 의원은 “언제 넘길 것이냐”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또한 이 부회장이 설립했던 인터넷 벤처기업 ‘e-삼성’의 실패를 언급하는 한편, 배터리 폭발사고로 단종된 갤럭시노트7을 ‘이재용폰’이라 지칭하며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미래 가치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질 문제까지 거론했다. 모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는 무관한 얘기들이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이 부회장의 나이를 거론하며 “50도 안됐는데 평소에도 누가 질문하면 동문서답을 하느냐”고 질책한 뒤 답변이 늦어지자 “자꾸 머리 굴리지 말라”며 인격 모독성 발언을 이어갔다.
또한 이 부회장이 장충기 삼성전자 미래전략실 사장으로부터 최순실 측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바 없다고 하자 “장충기 사장을 해고시켜라. 300억을 비선실세에게 주는데 부회장에게 보고를 안했다면 삼성이 이상한 기업 아니냐”고 다그쳤다.
내년이면 팔순을 맞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아들뻘 되는 국회의원들의 ‘면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 회장에게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일해재단에 돈을 낸 게 자발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을 언급한 뒤 “박 대통령이 K스포츠와 미르재단에 돈을 내는 것에 대해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정 회장이 “내용은 잘 모르겠다. 일정도 말씀을 안하셨다”고 답하자 박 의원은 “검찰 공소장에 KD코퍼레이션으로부터 11억원, 플레이그라운드로부터 62억원을 뜯겼다고 나온다”며 “특권 남용에 의해서 돈을 뜯긴 거다. 창피하지도 않느냐”고 면박을 줬다.
나이 지긋한 대기업 총수들이 단체로 이름을 불려가며 대답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이건희 아들 이재용, 정주영 아들 정몽구, 구자경 아들 구본무, 최종현 아들 최태원, 조중훈 아들 조양호, 신격호 아들 신동빈” 등 재계 총수들과 부친의 이름을 부른 뒤 “오늘 청문회에 지난 1988년 5공 청문회 때 나온 이들의 자식들이 6명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식들까지 정경유착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라며 총수들에게 돌아가며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대답할 것을 강요했다.
하 의원은 또 총수들에게 전경련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며 돌아가며 ‘네’라고 답하라고 윽박지르는 굴욕적인 상황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환골탈태 하겠다”고 돌려 말하자 끝까지 윽박질러 대답을 얻어내기도 했다.
굴지의 대기업들을 이끄는 총수들에게 청문회 주제에서 벗어난 엉뚱한 사안까지 들먹여가며 어린아치 혼내듯 면박을 주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청문회 중계를 본 재계 한 관계자는 “증인들에 대한 예의를 지킨 의원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증인을 죄인 취급하고 인격 모독을 주며 갑질하는 게 대중적 인기를 끄는 비결이라 생각하는 의원들도 있는 것 같았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도대체 최순실 청문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많이 나왔다”면서 “일부 의원들은 마치 평소 대기업들에 품고 있던 불만들을 이날을 기회삼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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