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의 문화 꼬기>청불영화의 극단화에서 새로운 전환 필요
아수라는 아수라였다.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선과 악의 구분도 잘 되지 못하고, 적과 아군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미 주인공 자체가 나쁜 놈이었다. 멋있는 주인공이 나쁜 놈이었기 결론이 어떻게 날 지는 예측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범죄자를 쫓는 검찰이나 형사가 선한 캐릭터일리도 없었다.
박성배(황정민)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한도경(정우성)은 아픈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는 인물로 변했지만 말이다. 이복동생이기 때문에 한도경의 아내를 도와주는 박성배는 일말의 윤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의리와 우정을 말한다. 그것도 의심하여야 하니 뒤죽박죽 아수라였다.
어쨌든 영화 ‘아수라’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상황은 할리우드 액션물과는 다른 면이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강변을 하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김영란법으로는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부패세력의 음모와 배신 범죄에 분노해왔던 서민들에게는 더욱 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 ‘내부자들’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왔듯이 말이다. 영화 ‘내부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애초에 개봉 전에 ‘무한도전’에서 출연진들이 노출되어 관심을 증대시켰다. ‘무한도전’에서 다뤄지면 대중적인 관심이 크게 몰린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예매률이 폭증했다. 물론 다른 영화들은 ‘무한도전’의 프리미엄을 누리지 않아왔다.
그럴만한 영화인지 생각하게 된다면, 아울러 생각해 볼 점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영화 ‘아수라’ 역시 쎈 자극의 영화 트렌드에 합류했다. 청불 영화가 어느새 잔인한 장면이 많으면, 그 등급에 오르는 것으로 굳어졌다. 갈수록 사람을 어떻게 하면 잔인하게 해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영화제작연출자들이 되었다. 각종 도구를 이용하여 그 방법의 구현에 상상의 나래를 극한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청불 영화에 해당하는 소재는 많을 것이다. 예컨대 실제 정치 권력적인 민감 소재를 다루는 것도 그 예가 될 텐데, 그런 영화는 어느새 한국 영화에서 실종되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부패와 비리를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복수가 과연 그렇게 찬사를 보낼만한 대상인가 싶다. 그들은 오히려 깃털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중적인 정서에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을 대리 충족시켜주므로 부정 부패자를 드러내주는 것은 대중적인 통쾌함을 분출하기 알맞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한국의 영화들은 많은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조폭이나 사기단은 너무 식상하고 기업인, 언론인, 경찰, 검찰, 국회의원 등의 금권과 공권력을 가진 이들은 물론이고 이제는 지자체장을 범죄의 악마로 등장시켰다. 이러한 점은 한낱 수도권 위성도시 시장인 박성배가 온갖 비리와 범죄를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인물로 그리는 이유가 된다. 살인을 형사나 조폭을 활용하여 밥 먹듯이 교사하고, 조종하며 심지어 총기를 마음대로 다루고 검사나 경찰도 해친다. 결말의 순간을 보면, 갑자기 리얼에서 환타지 누아르로 변화한다. 현실공간에서 액션 영화로 비약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사회 이면의 권력관계의 비정함과 무도함을 다룰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생겼다. 즉 의식 있는 영화라는 찬사가 내려지면서 청불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호평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들의 기본적인 한계점은 다시 노출된다. 즉, 일개 개인의 악성(惡性)에서 모든 상황을 기인한다는 오류를 만든다. 개인의 욕망이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며 사회적인 해악을 크게 끼친다는 식의 설정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투자와 투기의 구분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안에 있을수록 사람들은 범죄와 노동을 구분하지 못하기 쉽다.
그냥 자신의 삶을 위해 열심히 살면 되면 그뿐이지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 묻지 않게 되면 더욱 그러하다. 형사가 아내를 위해 병원비를 벌수 있는 방법이 납치 협박이나 살인 대행이라면 그것은 시스템이 잘못된 것이다. 일개 시장이 온갖 전횡을 일삼는대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제도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대중오락영화는 이런 제도는 도외시한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은 시각적인 자극만 일품인 총이나 칼로 해결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총이나 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아수라’는 현실적인 영화가 아닌 셈이다. 우리는 총이나 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없는 현실에서 해법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할 지라도 말이다. 그것을 보여줄수록 오히려 대단한 영화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영화들은 세상의 진리를 알려주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허위이며, 사실 세상의 법칙은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고 비정하고 냉혹하며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이 대체적이다. 그러나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너무나 많다. 애써 그런 진리를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대한민국 서민들이 살아가는 상황이 영화가 그리는 세상 보다 더 심하고 구조적으로 이미 그러하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망을 보는 것이다. 희망이 담겨 있지 않다면 단지 염병할 것 같은 현실을 확인하러 영화를 보러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