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곡성'?...관객들은 사육당하고 있다
<김헌식의 문화 꼬기>숫자가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한국 영화산업의 폐해
2016년 관객들은 여전히 사육당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육당한다는 말은 더 큰 수익을 위해서 억지로 영화를 섭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게 현실이다. 그 방법의 기저에는 불안한 관객들의 일상과 피로가 축적되어 있다. 그것을 영화 자본과 기업이 갖가지 방법으로 사육을 통한 수익 창출 짜내기에 활용하고 있다.
사육장은 일단 멀티플렉스이다. 멀티플렉스는 어디에라도 있다. 접근성이 용이해졌다. 그렇게 어디에나 있으니 관객들은 멀티플렉스에 무조건 가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화를 선택한다. 이 역시 경제학자들의 기본 전제가 가볍게 무너지는 행태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경제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경제적인 이익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사전에 치밀하게 탐색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멀티플렉스에 가는 관객들은 사전에 그렇게 치밀하게 정보를 탐색하지는 않는다. 돈을 내고 영화를 통해 얻을 편익에 대해 치밀하게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보도록 멀티플렉스가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영화관 방식은 이미 소멸했다. 멀티플렉스에 내걸린 영화들 중에 선택을 하는데 사실상 선택할 것도 없다. 이유는 특정 영화가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간대에는 어김없이 특정 영화만이 스크린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애초에 보지 않으려 했던 영화들을 접하게 된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화들은 심야 시간이나 애매한 시간에 상영하기 때문에 관람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대규모 물량 공세로 관객들이 자신들이 관람을 원하지 않는 영화를 소비하도록 사육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억지로 보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또한 마케팅 기법으로 억지로 영화를 섭취하는 행태를 합리화 하도록 만든다.
포털 검색어 1위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대규모 스크린 지배로 일단 초기부터 흥행 숫자를 만들어낸다. 그 흥행 숫자가 올라갈수록 관객들은 그 영화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심코 포털의 1위 기사들을 클릭하듯이 말이다. 재미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형성이 되지만, 그 영화를 봐야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도 아니고 보고 나서도 강하게 추천하고 싶지도 않은데, 어느새 숫자가 되어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다. 후회의 감정이나 부정적인 느낌이 있어도 그 숫자들이 올라가면서 숫자에 묻힌다.
인지 심리학에는 반복 효과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상품 소비, 특히 콘텐츠 소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싫은 음악도 자주 들으면 익숙해진다. 자주 사람들에게 들리게 하려면 자본의 힘이 필요하다. 그만큼 막대한 물량 공세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주 듣게 만들어야 한다. 이른바 사육당하는 것이다. 그렇게 친숙해진 음악 코드는 다음 번에는 자연스럽게 선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영화들을 처음볼 때는 낯설지만 보다가 익숙해지고 뭔가 의미가 있는 듯이 보인다. 더구나 각종 매체들이 의미와 가치를 분석하고 호평을 낸다면 쉽게 어느새 스스로도 영화적인 평가를 통해 자신들의 영화 선택을 합리화하게 된다. 여기에서 해외 영화나 해외 저널들의 긍정적인 평가들은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이러한 해외 호평은 마케팅 차원에서 계획된다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해외 전문 평론가들이 좋게 말했으니 최소한 뭔가 있겠거니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처음에는 반발 심리나 저항감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느낌과 생각은 뒤로 치워버린다. 그리고 어느새 잘 모르겠다는 심리로 포기해 버린다. 피곤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숫자와 평가들이 혼돈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멀티플렉스의 영화들을 선택한다. 뭔가 다른 시대적인 트렌드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수록 뭔가 휑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해외에 수십개 이상의 국가에 수출되는 한류 상품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침묵하게 된다. 그리고 비슷한 영화들을 다시 소비하는데 심리적 무장해제당한다.
영화 '곡성'이나 영화 '아가씨'는 기획 제작단계부터 막대한 홍보를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돈이 없는 제작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작품이 칸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더욱 궁금증을 유발했다. 역시 그 영화들은 스크린을 도배하다시피 멀티플렉스에 내걸렸다. 수많은 멀티플렉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들이 그것 밖에 없으니 관객들은 많이 들어 본 그 영화들을 선택한다.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지 않나,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칸에 진출했으니 뭔가 있기는 하지 않겠는가. 숫자는 당연히 올라가고 사람들은 어느새 의미와 가치를 덧붙이기 시작한다. 속으로는 아니다 싶은데도 말이다.
영화 '곡성'의 경우 기본적인 서사적 완결성도 부족한 데다가 억지로 의심과 회의에 관한 담론을 요즘 유행하는 오컬트 코드에 결합시켰다. 항상 새로운 코드를 통해 차별화를 기하여 우월자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소스를 제공해 주는 셈이다. 그러니 인식론적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희한한 말도 탄생했다. 말장난을 하기는 어느새 관객들도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현실은 없고 오로지 영화가 만들어낸 추상적인 개념들만이 존재한다.
삶의 경험치가 적은 도시인들이 문화 담론을 주도하는 상황이니 이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즉 장르물에 사육당한 이들에게 '곡성'은 좋은 식량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사람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방법이나 구조의 꽈배기 설정을 통해 뭔가 있는 것처럼 머리 운동 시키는 스토리만 존재해도 족해진 것이다. 흥행 숫자가 높아질수록 알아서 매체들은 그 이유를 만들고 덧붙여 낸다. 공허한 담론들이 난무한다.
영화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감동은 여전히 없고,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도 없다. 하나는 있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 노예였다는 사실을 유럽에 알렸다는 것. 그의 영화도 노예였다. 이제는 안되겠다 싶었던 것이리라. 영화 '올드보이'처럼 원작에 기대어 수십년 철지난 유럽 담론을 줏어다가 상을 받겠다고 버무렸다. 여성성에 아부하면, 여성들이 박수라도 칠 줄 알았는가보다.
영화 사대주의한다고 되는 문제는 이제 아니다. 남성성이 무너지면 여성도 죽고 남성도 죽는데 말이다. 여성성의 과잉이면 남성도 죽고 여성도 죽는데 말이다, '지적 사기'라는 책에서 왜 라깡을 지적 사기꾼이라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근대철학의 찌꺼지 주워 먹는 일은 해결책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힘들고 피곤하다. 생활인들이 영화를 소비하는 근본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더 이상 사육당하는 일은 한국 영화나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다. 그런 속에서 영화는 또하나의 획일화를 낳을 것이며 삶과 영화가 유리될 것이다. 피곤한 삶이 증가할수록 사육장으로 꾸역꾸역 가야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영화는 없고 외국 담론이나 주워다가 뭔가 있는 체 하는 영화만 여전히 범람한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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