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의 문화 꼬기>집밥 열풍의 문화심리ㅡ집밥 그리고 파랑새
“얘, 모름지기 사람은 아침밥을 먹어야 속이 든든한 거야/먹고 또 자더라도 일단 먹자/어? 아침 먹자.” ㅡ양희은의 ‘나영이네 냉장고’에서
“집 밥 너무 그리워/가족의 마법/본가 따뜻한 집으로/내가 쉴 수 있는 곳.” ㅡ김범수의 ‘집밥’에서
집밥의 인기 트렌드를 반영하듯 집밥을 내세운 식당들이 실제 이곳저곳에 등장하고 있다. 방송은 물론 책의 출간 등도 집밥인기 현상을 드러내주거나 반영하고 있다. 이들 식당에서는 말그대로 집에서 먹는 밥을 선보인다.
집밥이란 집에서 먹는 밥을 말하지만, 여기에는 좀 갸우뚱거릴만한 점이 있다. 집에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거나 라면에 밥을 말아먹어도 집밥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집밥이란 엄마가 해주는 밥이다. 또한 배우자가 해주는 밥이기도 하다. 엄마나 배우자가 해주는 밥에 고추장이나 라면을 기대한다면 차라리 혼자 밥을 해먹고 말아야 한다.
고추장이나 간장에 비벼먹는 밥은 반찬이 부실하다. 반찬이 좀 더 풍성해야 집밥이다. 라면은 쌀밥등이 아니다. 밀가루 음식이 아닌 곡물로 지어야 집밥의 대상에 올라갈 수 있다. 식당에서 선을 보이고 있는 메뉴는 시각적으로 화려하거나 다양한 반찬을 선보이지는 않아 단촐한 밥상이지만, 신선한 재료를 바탕으로 건강에 좋은 밥상을 일컬어 집밥이라고 말한다.
집밥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배경적 요인이 제기되고 있다.
일단 외식 문화가 발달한 때문인데 밖에서 밥을 많이 사먹다보니 이에 대한 피로감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밖에서 먹는 음식들은 강한 향신료를 사용한다. 소금과 설탕, 고춧가루를 많이 사용한다. 그만큼 자극적이다. 나아가 기름지고 MSG같은 화학조미료도 집에서 먹은 밥보다 더 많이 사용한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는 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음식들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맛을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각 개인의 특성을 생각할 수 없다. 즉 정형화, 표준화 된 맛이다. 어떤 사람은 소금이나 설탕을 덜 먹는다. 맵거나 강한 향신료가 들어 있는 음식을 꺼리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화학 조미료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확증이 없다지만, 각 개인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낳는다. 집에 있다면 이런 개인의 요구를 반영하는 식단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 맞춤식 식단이 가능하겠다.
그럼 웰빙음식과 어떤 점이 다를까.
웰빙음식은 유기농 식단과 같이 몸에 좋은 건강 식단을 말한다. 대체적으로 인공적이고 화학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재배하지 않은 식재료나 그것으로 만든 음식을 말한다. 밥이라는 형태를 요구하지도 꼭 집에서 먹는 음식이라는 규정도 없다. 어쩌면 밥의 형태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애초에 집밥은 웰빙음식을 담아내지 못했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벗어나자고 하니, 꼭 곡물밥이 있는 집밥과 차원이 완전 달라보인다.
기존의 음식 모두를 뛰어넘고자 하니 외식이나 집밥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음식들인 셈이다. 치유의 음식이라는 개념과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치유의 음식은 몸이 일정하게 훼손 되어 있는 것을 아물게 하는 특징이 있어 보인다. 치료의 관점은 아니지만 좀 더 몸에 직접적인 효과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치유의 음식도 웰빙 음식과 같이 기존 외식과 집에서 먹는 밥을 벗어난다.
다른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마치 파랑새를 찾아 어딘가로 찾아가야할 것 같다. 좋은 음식을 찾아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다니다보니 정말 그렇게 찾았던 음식은 바로 집에 있었다. 파랑새를 찾아 세계를 찾아 다녔지만 애초에 출발했던 곳에 파랑새가 있었다.
집밥은 파랑새였다. 그러나 파랑새는 없었다. 파랑새를 보려면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파랑새는 집에 없고, 식당에 있었다. 집밥을 집에서 먹을 수 있다면, 집밥이 식당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물물이 사라지니 우물물이 상품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집밥은 사라졌다.
이제 집에서 밥을 해주는 사람은 없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 상황에서 외식 상업은 더욱 증가해왔다. 혼자 사는 집에서는 집밥이 없어지고 간단한 식사들이 많아진다. 우린 너무나 당연한, 그리고 한때는 이상적인 삶이라 여겼다. 정말 이었을까.
많은 트랜드 전문가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요즘 세대들은 자기를 위해 투자를 많이 한다고. 이를 자기투자라고 한다. 자기 몸이 아주 소중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투자에 강한 그들은 밥도 자신들을 위한 성찬을 만들어 누려야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혼자 있으면 밥을 어떻게 먹어도 이렇다할 소리를 할 사람이 없다. 간단하게 먹어도 아니 부실하게 때워도 이를 지적하거나 잔소리할 사람도 없다. 식재료가 남을 것이기 때문에 요리를 안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같이 먹는 밥을 위해 노력을 하며, 좀 더 발전 가능성을 내재한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와 나눌 음식에 대해서 더 신경을 쓸 것이다. 혼자 밥을 해먹으면 처음에는 대견하고 만족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효용성이 떨어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는 부정적일 수 있지만, 긍정적인 방향성도 내재하고 있다.
싱글족들을 위한 1인 식재료와 주방기구들이 증가한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집밥은 더욱 가치를 지닐 것이다. 집밥은 아무나 먹을 수 없는 밥이 되어가는, 누구나 누릴 수 없는 상품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집밥은 엄마의 밥이기도 하다. 엄마의 밥은 아이를 위해서 정성과 배려를 담은 밥이다. 찬은 많지 않아도 아이가 그 밥을 먹고 건강하게 실하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아이가 먹는 밥에 소금과 설탕을 너무 많이 넣지 않을 것이며 화학조미료도, 인공 첨가물도 덜 넣을 것이다. 몸에 좋은 것만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맞는 음식을 맞게 만들어낼 것이다. 아이를 먹이는 밥이 집밥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맞춤식으로 짓는 밥이다. 그러니 집집마다 먹는 밥과 반찬이 다르듯이, 집밥의 종류는 다양할 수 밖에 없어야 한다.
집밥은 그 식구들을 위해 지은 밥이다. 식구는 가족이요 소중한 사람을 의미한다. 대체불가능한 사람을 위한 주인이 있는 밥이다. 누가 먹을 지 명확히 알고 만든 밥이다. 가격과 수익을 우선 생각하여 음식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식당의 밥들은 누가 먹을지 알 수 없는 뭇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질 뿐이다.
집밥은 그렇기 때문에 대량 생산으로 무한정 만들어 낼 수 없다. 그 밥을 공유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만약 집밥으로 돈을 많이 벌려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며,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집이 없는 상황에서 집밥을 사먹을 수 밖에 없다. 도시에서 빈번해지는 것은 집은 있으되 가족이 없는 일상이다. 집이 없다는 것은 가족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이 없는 집에서 밥은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언제든지 음식을 외부에서 사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가족을 중심으로 있었던 음식이었다. 인간의 생명과 삶의 유지에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음식을 소외시켰다.
소외의 집밥은 식당을 통해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더이상 집밥이 아니다. 집에서 나온 집밥일 뿐이다. 집밥은 가족안에 자기 식구들을 위한 밥일 때만 가능하다. 밥을 먹일 사람도 먹여줄 사람도 없는 집에 집밥은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집밥을 집에서 먹을 수 없을 수록 집밖으로 나온 집밥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며 가격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집밥을 사먹을 수 밖에 없다. 다른 어떤 음식보다 각 개인들을 생각하는 밥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들을 생각하는 밥, 그 밥으로 계속 식당은 진화할 수밖에 없다. 대규모 수익성과는 거리를 둔 식당에서 사람을 식구같이 소중하고 귀하게 먼저 고려하는 요리가 번창하는 것은 가족의 해체가 가속화 될수록 비례할 수밖에 없겠다.
집밥 열풍은 단지 음식 자체가 아니라 싱글족 찬양의 시대가 맞고 있는 한계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주 품귀의 밥이다. 부유한 집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호사품이다. 보통의 집에서는 집에서 밥을 해줄 사람은 없고 남에게 밥을 해주려는 생각도 없다. 대신 열심히 자신의 성공과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집밥 마저 사먹으먼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 집에서 밥만하고 있다면 손가락질 하는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글/김헌식(문화평론가, 동아방송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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