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박지성 최고경기 파노라마 ‘전설이 된 순간들’
한국축구 영원한 아이콘, 되돌아본 기념비적인 장면들
14일 은퇴를 선언한 박지성(33)은 200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특유의 헌신적이고도 영리한 플레이로 동료들과 감독, 팬들로부터 두루 신뢰를 받는 선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잉글랜드), PSV 에인트호번(네덜란드) 등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준 숱한 명장면들은 한국축구의 역사를 빛낸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2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포르투갈전
'월드컵 스타' 박지성의 탄생을 알린 기념비적인 경기였다. 앞선 2경기에서 1승1무를 기록한 한국은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우승후보로 꼽히는 강호 포르투갈과 만났다.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으로 그라운드를 누빈 박지성은 전반 26분 주앙 핀투의 백태클 퇴장을 유도,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0-0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후반 25분에는 이영표의 크로스를 이어받아 환상적인 오른발 트래핑으로 수비를 따돌린 뒤 왼발 슈팅으로 골키퍼 다리 사이를 뚫고 골문을 갈랐다. 이전에 한국축구에서 보지 못한 환상적인 테크닉이자 한국의 16강 진출을 확정짓는 골이기도 했다.
골을 터뜨린 직후 자신을 믿고 월드컵 대표팀에 불러준 ‘은사’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뜨겁게 포옹하며 기쁨을 나누는 장면은 한국축구 월드컵 역사에서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2005년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AC 밀란전
박지성은 2002 한일월드컵 이후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하며 유럽진출에 성공했다. 초기의 슬럼프와 극심한 비난여론을 딛고 화려하게 재기한 박지성은 2004-05시즌 명실상부한 아인트호벤 에이스로 성장했다. 세계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UEFA 챔피언스리그는 박지성의 성장세를 확인하는 또 다른 도약의 무대였다.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만난 AC 밀란은 당시만 해도 유럽 최정상이었다. 1차전 밀란 원정에서 0-2로 패한 아인트호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박지성은 전반 9분 만에 벼락 같은 선제골을 작렬, 아인트호벤의 결승진출 희망을 되살렸다. 비록 3-1로 승리하고도 원정골 우선 원칙에 따라 결승 무대 진출이 좌절됐지만, 경기 내내 공수에 걸쳐 그라운드를 지배한 박지성 활약에 매료된 퍼거슨 감독은 그를 맨유로 데려갔다.
2010년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AC 밀란전
골을 넣지 않고도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 박지성의 맨유 시절 챔피언스리그 최고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회자되고 있는 경기다. 2005년 에인트호벤 시절 당시 박지성이 공격의 핵이었다면, 맨유 퍼거슨 감독은 이날 박지성의 중앙 미드필더로 돌려 수비의 중심으로 기용, AC밀란의 미드필더 안드레아 피를로를 전담마크 하도록 지시했다.
피를로는 당시 세계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밀란 전술의 핵이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박지성의 끈질긴 밀착수비에 막혀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피를로가 봉쇄되며 무력해진 밀란을 상대로 맨유는 원정 1차전을 3-2 승리했고, 홈 2차전에서는 4-0 대승했다. 당시 보여준 박지성의 왕성한 활동량과 높은 전술 이해도는 지금도 팀플레이의 교본으로 꼽힌다.
2009/2011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바로셀로나전
냉정히 말하면 박지성 개인의 활약으로는 그리 뚜렷한 인상을 남긴 경기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박지성의 축구인생에서, 한국축구사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선발출전'이라는 기념비적인 의미를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맨유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2008년 결승에서 퍼거슨 감독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출전 엔트리에서 제외돼 충격을 받았던 박지성은 이듬해 2009년과 2011년 결승전에서는 모두 선발 출전했다.
아쉽게도 박지성의 우승 꿈을 가로막은 것은 두 번 모두 바르셀로나였다. 2009년 0-2, 2011년에는 1-3으로 모두 무릎을 꿇었다. 박지성은 변함없이 특유의 헌신적인 움직임으로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리오넬 메시와 '티키타카'의 최전성기였던 바르셀로나의 경기력은 맨유를 압도했다.
비록 현장에서 우승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지만, 맨유가 2000년대 중후반부터 챔피언스리그의 단골우승후보로 거론될 때마다 박지성이 팀의 한 축으로 보여준 공헌도는 한국과 아시아 축구팬들에게 자부심을 심기에 충분했다.
2010-11시즌 프리미어리그 11라운드 울버햄튼전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후 공격적인 면에서 최고의 원맨쇼를 펼친 경기다.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홈경기에 선발로 나선 박지성은 전반 45분 선제골을 작렬했다. 이어 1-1 무승부의 짙어가던 후반 47분 인저리타임에는 페널티 라인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파고들어오며 밀집수비를 제치고 감각적인 왼발슈팅으로 다시 한 번 상대의 골문을 열어젖혔다.
당시 주축선수들의 줄부상 속에 고전하던 맨유는 박지성의 놀라운 활약에 힘입어 승점3을 확보하며 선두경쟁을 이어갔다. 박지성은 이 시즌 8골 5도움을 기록하며 맨유 이적이후 개인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 수비만이 아니라 공격에서도 재능이 있음을 보여줬다.
2010-11시즌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 첼시전
박지성은 EPL 시절 유난히 '강팀 킬러'로 명성을 떨쳤다. 맨유와 빅4를 호령하던 리버풀, 첼시, 아스널 등 우승권 팀들과의 라이벌전마다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거나 결정적인 활약을 펼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활약은 2010-11시즌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 첼시와의 홈경기다.
사실상의 우승결정전으로 꼽힌 이날 경기에서 박지성은 전반 39초 만에 감각적인 스루패스로 치차리토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자신의 5호 도움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경기 내내 중원과 측면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량으로 첼시 공격의 맥을 차단하며 숱한 역습의 기회를 만들었다.
이날 맨유는 비디치 결승골로 2-1로 승리하며 통산 19번째이자 박지성의 맨유에서의 마지막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스카이스포츠’ 등 영국 현지 언론은 박지성에게 최고평점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를 앞세워 상대에게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고 극찬을 보냈다.
2010년 국가대표 친선전 한일전
일명 '산책 세리머니'로 더 유명해진 경기. 2010 남아공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부담스러운 한일전을 원정으로 치르게 된 것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일본은 자국의 월드컵 출정식이기도 했던 이날 경기에서 베스트멤버들을 총동원하며 승리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한국에는 박지성이 있었다. 박지성은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빼앗아 페널티라인까지 상대 수비수 3~4명을 제치며 폭풍 같은 드리블을 선보인 끝에 감각적인 오른발 슈팅으로 골문을 갈랐다. 사이타마 경기장을 가득 메운 5만 명의 일본의 관중들은 일제히 침묵에 빠져들었다.
박지성은 골을 넣은 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관중석을 바라보며 마치 산책을 하듯 여유롭게 한 바퀴 돌았다. 별다른 인위적인 몸짓 없이도 충분했다.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를 보여주는 듯한 그 여유만으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퍼포먼스였다.
2010 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그리스전
박지성의 마지막 월드컵이자, 화려한 국가대표 커리어에 정점을 찍은 경기였다. 이정수의 선제골로 1-0 앞서가던 후반 7분. 상대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가로채기에 성공하며 드리블 돌파에 이은 왼발슈팅으로 쐐기골을 터뜨렸다.
한국축구사상 원정에서 유럽팀을 상대로 첫 승리를 확정짓는 골이자, 박지성 개인으로는 2002년 포르투갈전, 2006년 프랑스전에 이어 아시아선수 최초로 본선 3회 연속 득점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득점 이후 평소 냉철하던 모습과 달리, 방정맞게 양팔을 좌우로 흔들며 포효하는 모습이 봉산탈춤을 연상시키는 '봉산 지성'세리머니로 팬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한국은 그리스전 완승을 바탕으로 한국축구 사상 원정 16강 달성에 성공했다. 2002 한일월드컵 세대가 배출한 대표주자이자 주장으로 나선 박지성으로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대적 소명을 완수하며 명예롭게 대표팀을 물러날 수 있는 유종의 미를 거둔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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