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산업,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본격적 성장
대중국 의존서 시작된 석유화학산업의 위기와 구조적 문제
정책금융, R&D 지원 등정부와 업계의 위기 극복 노력
#포지티브적 해석: 아직 숨은 붙어있다. 혼신의 인공호흡 성공할까.
#네거티브적 해석: 인공호흡 해줘야 할 정부는 계엄‧탄핵 사태로 인공호흡 받아야 할 상황.
한국에서는 ‘밥’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안부 인사 ‘밥 먹었어’부터 화났을 때는 ‘밥맛없어’, 행복하면 ‘밥 안 먹어도 든든하다’ 등 웬만한 희로애락은 ‘밥’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오죽하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말까지 있을까요. 우리에게 있어 ‘밥’이 얼마나 중요하고 삶의 근간에 맞닿아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산업에서도 중요하고 주요 산업의 기초소재라는 의미를 담아 ‘산업의 쌀’이라 부르는 산업이 있습니다. 바로 석유화학산업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의 제품은 석유화학제품들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일상의 의식주부터 전자, 자동차, 건설 등 현대문명의 기반은 석유화학에서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50년간 석유화학산업이 큰 기둥으로서 한국 경제를 지탱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석유화학산업으로 인해 우리의 경제 밥상이 휘청이고 있습니다. 위기. 불황. 부진. 둔화. 비상. 악재. 벼랑 끝. 석유화학산업 뉴스를 보면 이런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이 줄줄이 딸려 나오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정부가 ‘전례 없는 위기’라며 국내 석유화학산업 살리기에 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비료산업부터
해방 이후인 1950년대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 달러에 불과했으며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질소비료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충주비료공장을 건설했고 이후 화학비료 산업은 대부분 소멸했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됐습니다.
본격적인 산업 발전은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1966년 당시 정부는 국가시책으로 추진하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제철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을 핵심 육성사업으로 선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업스트림 부문은 대한석유공사(현재 SK), 다운스트림은 충주비료공장을 주축으로 하는 울산 석유화학단지가 1972년에 준공되면서 우리나라도 기초 원자재부터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석유화학산업의 생산체제를 갖추게 됐습니다.
이후 탄력을 받은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시책에 힘입어 덩치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정부 주도로 추진되던 여수석유화학단지가 민간사업자를 찾지 못하게 되자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1978년에 민영화 시대를 맞게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성, LG, 현대, 롯데 등 대기업들이 발을 들이게 되면서 산업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경쟁자의 출몰로 기업들은 원가절감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됐고 그 결과 1990년대 이후부터는 수출주도형으로 자리 잡고 1993년 에틸렌 기준 세계 5위 생산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현재는 생산능력 기준 세계 4위로, 생존의 절박함 속에서 씨앗을 뿌린 산업이 오늘날 세계 4위 석유화학 강국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수출 효자에서 위기의 주범으로…중국의 역습
이렇게 한국이 석유화학산업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던 것은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90년대 서유럽, 일본 범용 석유화학 구조조정에 따른 공백을 메우면서 입지를 구축한 한국은 중국 시장을 겨냥한 대규모 설비투자를 해왔습니다. 중국은 두 자릿수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경제 대국이며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이 있어서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석유화학 자급률이 낮아 국내 기업이 쉽게 진입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20년간 성장 가도를 달리던 현재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국내 석유화학산업을 위기에 빠뜨린 것도 바로 이 중국입니다. 석유화학산업 기사를 최근 몇 년간 잠깐이라도 보셨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발 공급과잉, 저가공세입니다.
중국은 자급률 100%를 목표로 2019년부터 석유화학 공장 설비를 증설하고 있습니다. 내년 중국의 석유화학 생산능력은 글로벌 전체의 24%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2022년 에틸렌 기준 최대 생산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그간 수입에 의존했던 에틸렌 자급률을 급상승시켰으며 곧 순수출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중국 석유화학 설비들은 대부분 COTC 형태로, ▲비용 감축 ▲석유화학·정유 제품 비중 조절 가능 ▲높은 석유화학 생산 환산율 등 경쟁력을 갖췄습니다.
이런 중국의 공격적인 투자 기조는 그간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에 심각한 내상을 입혔습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석유화학제품 수출액은 지난해 동기보다 15.9% 줄어든 457억 달러(약 62조6000억원)이며 이 중 대(對)중국 수출액은 17.6% 감소했습니다. 그만큼 국내 주요 나프타 분해시설(NCC) 평균 가동률도 73%로 주저앉았습니다. 2000년대 과반을 차지했던 대중국 수출 비중은 꾸준히 하향세를 보이며 지난해 37%까지 급감했습니다. 2030년에는 10년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분석됩니다.
여기서 ‘중국만이 답이냐, 중국 말고 다른 곳에 수출하면 되지’라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분이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습니다. 양국의 주요 수출 시장이 미국, 베트남, 인도 등으로 겹치기 때문입니다. 가격 등 강력한 경쟁력을 지닌 중국이 순수출국으로 변한다면 중국에서 줄어든 감소분을 타 수출국으로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글로벌 환경규제 또한 석유화학산업의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석유화학은 온실가스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산업 위축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재활용, 바이오 플라스틱으로 대체되면서 2030년 한국의 유럽향, 미국향 수출은 지난해 대비 각각 39%, 27% 줄어들 것으로 관측됩니다.
이로 결국 2030년 국내 석유화학 수출과 생산은 20년 전 수준까지 회귀할 것이란 절망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현재 국내 상황에 대해 자조적인 목소리로 ‘더 이상 답이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찬란했던 50년의 역사에도 이제 미래조차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기감이 극심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이 없는 걸까요? 드디어 한국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합니다. 조금 아니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는 지난 23일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사업 재편 지원에 나섰습니다.
정부는 세계적인 석유화학 설비 증설에 따른 글로벌 공급과잉을 핵심원인으로 짚으며 세계적인 설비의 증설 추세를 고려한다면 2028년까지 글로벌 공급과잉이 심화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후에도 업황 회복 가능성은 불확실해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사업 재편이 시급하다는 판단입니다.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 방향을 세웠습니다. 공급과잉 해소를 위해 업계에서는 합작법인 설립, 매각 등 다양한 방식을 검토 중인 가운데 정부는 고용·지역경제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시스템 및 설비합리화 의사결정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정비를 추진합니다. 또한, 원료·유틸리티·안전 등 관련 규제를 합리화하고 범용 제품에서 고부가·친환경 제품 전환을 위해 R&D 지원을 할 방침입니다.
이밖에도 정상기업의 설비투자 및 운영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3조원 규모의 정책금융을 공급할 계획입니다.
다시 ‘밥’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석유화학산업이 비록 성숙산업이고 공급과잉이 심한 레드오션이지만, 이걸 아예 포기할 순 없습니다. 모든 산업의 바탕이 되는, ‘산업의 쌀’을 만드는 산업이기 때문이죠.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석유화학산업을 성장시켰던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다시 한 번 성공을 거두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