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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석유파동 극복‧IT강국 도약 이끌었는데…억울한 특혜시비


입력 2022.05.12 06:00 수정 2022.05.12 08:12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유공 인수, 최종현 사우디 인맥 통한 석유파동 극복 능력이 주효

이통사업 진출, '대통령 사돈가' 낙인으로 오히려 손해

다들 뜯어말린 하이닉스 인수…SK 없었다면 쌍용차 꼴 났을 수도

산업 패러다임 전환 고려한 전략적 투자로 재계 2위 도약

최태원 SK그룹 회장. ⓒSK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70~80년대 전세계를 휩쓴 1‧2차 석유파동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SK가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일찌감치 정보통신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하이닉스가 SK그룹으로 인수되지 않았다면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의 치킨게임에서 승리해 글로벌 빅2로 자리한 지금의 SK하이닉스가 존재할까.


지난해 말 기준 그룹 총 자산 292조원을 기록하며 재계 서열 2위로 도약한 SK그룹에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인수합병(M&A)으로 성장한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치권과의 혼맥(婚脈)과 얽혀 SK그룹이 정권의 특혜로 성장한 것이라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현재 SK그룹의 3대 핵심 축인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SK하이닉스가 모두 M&A를 통해 합류한 기업들이니 나오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사명 앞에 SK를 달게 된 배경을 자세히 짚어보면 ‘특혜’가 아닌 최종현-최태원 회장이 대를 이어 지켜온 ‘사업보국’의 길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종현, 사우디와의 인맥으로 석유파동 위기 극복 이끌어


1980년 재계 10위권의 선경(SK의 전신)의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 기업 선정은 재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 인수전에는 재계 1‧2위 기업도 뛰어들었던지라 선경이 승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당시 정부가 ‘의외의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전세계를 휩쓴 제2차 석유파동이 있었다. 1978년 12월 발발한 제2차 석유파동은 우리나라와 같은 비산유국이자 개발도상국에는 견디기 힘든 파고였다.


심지어 전세계 석유공급을 좌우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한국을 석유수출금지국으로 분류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가 최종현 선경 회장이었다. 선경직물에서 생산하는 합성섬유들의 주 원료인 석유를 수입하면서 중동거래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은 최 회장은 사우디에 급파돼 한국에 대한 OPEC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 왕실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우리나라는 에너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당시 정부가 최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앞서 1973년 10월 발생한 1차 석유파동 당시에도 그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이 1979년 임원세미나에서 강연하고 있다.ⓒSK

정부의 유공 민영화는 이전까지 유공 지분 50%를 보유했던 미국 걸프(Gulf)사의 지분 전량 매각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정부가 유공의 새 주인을 물색하며 내건 조건에는 ‘원유의 장기적·안정적 확보 능력’, ‘산유국 투자 유치 능력’, ‘산유국과 교섭 능력’ 등이 있었다.


1‧2차 석유파동의 해결사 역할을 했던 선경은 유공을 이끌어갈 최적임자였다. 더구나 최 회장은 사우디 야마니 석유장관으로부터 자사가 정유사업을 하게 되면 필요한 원유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알 사우디 뱅크로부터 1억 달러의 대부 보증서까지 받아냈다.


유공을 인수한 선경은 국내 대표 정유사이자 에너지 기업인 SK이노베이션으로 성장시키며 제조업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재계에서는 이같은 배경을 이해한다면 SK그룹이 유공을 인수하게 된 배경에서 ‘특혜’가 언급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되고도 반납…'대통령 사돈가' 낙인으로 오히려 손해


이동통신 사업 진출 과정에서의 ‘특혜시비’는 지금까지도 SK그룹이 가장 억울해하는 부분이다. ‘사돈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혀 오히려 손해를 봤으면 봤지 특혜는 없었다는 것이다.


SK가 정보통신 사업을 준비했던 시점은 80년대 초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종현 회장은 유공 인수 이후 석유화학 기반의 성장 포트폴리오로는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응하기 힘들다는 고민 끝에 무선정보통신을 차기 성장동력으로 지목하고 1984년 선경 미주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신설했다.


이 팀은 당시 정보통신 산업을 선도했던 미국에 현지법인(유크로닉스)을 설립하며 글로벌 시장 트렌드를 경험했고, 이후 국내로 들어와 선경텔레콤(이후 대한텔레콤으로 사명 변경)설립하는 등 이통산업 진출에 나섰다.


1992년 4월 체신부가 제2이동통신 민간사업자 선정계획을 발표하면서 선경도 이통사업을 본격화할 기회를 맞는 듯 했다. 당시 선경 외에도 포항제철, 코오롱, 쌍용 등 6개 컨소시엄이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선경은 10년 가까이 사업을 준비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성적으로 사업권을 따냈다. 선경이 받은 점수는 1점 만점에 8388점으로, 2위 포항제철(7496점), 3위 코오롱(7099점)과 1000점 내외의 격차를 보였다.


지금의 SK텔레콤을 ‘특혜의 산물’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여기까지의 사실만을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당시 선경 사돈가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SK그룹에게는 당시의 상황이 뼈아픈 흑역사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집권당(민자당) 김영삼 대표가 “현직 대통령의 사돈기업에게 사업권을 부여한 특혜”라며 문제제기를 하면서 상황이 꼬인 것이다.


당시 체신부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였다”고 항변했고, 경쟁자들과의 점수차도 공개됐지만 정치권으로 이슈화되면서 객관적 사실관계는 별 의미가 없었다.


결국 최종현 회장은 “특혜시비를 받아가며 사업을 할 수 없다. 오해 우려가 없는 차기 정권에서 실력으로 승부해 정당성을 인정받겠다”며 사업자 선정 일주일 만에 사업권을 반납했다.


재계에서는 당시 SK그룹에 ‘대통령 사돈가’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았더라면 더 이른 시점에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수월하게 이통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SK텔레콤 직원들이 기지국을 점검하고 있다. ⓒSK텔레콤

지금의 SK텔레콤은 제2이동통신 사업을 포기한 선경이 한국이동통신 인수를 통해 설립한 기업이다. 한국이동통신 인수는 바로 선경의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에 제동을 건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대통령에 오른 이후 이뤄졌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12월 정부가 보유한 한국이동통신을 민영화하는 방안과 기업간 경쟁으로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발하는 투트랙 방식으로 이통사업자를 선정했다.


김영삼 정부는 앞선 정부에서 제기된 특혜 공방을 의식한 듯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사업자를 선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업자간 이해관계가 복잡하니 재계의 맏형인 전경련이 주도해 자율적으로 정리하라는 취지였다.


공교롭게도 당시 전경련 회장은 최종현 선경 회장이었다. 최 회장은 선경이 경쟁에 참여해 실력으로 사업자로 선정되더라도 또 다시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우려가 있다며 아예 불참을 선언했다.


대신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과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주식시장에서 한국이동통신 주식을 공개매입하면 공정성 시비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


문제는 선경이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8만원 하던 한국이동통신 주가가 30만원대로 급상승했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선경은 평소 주가 보다 4배 이상 높은 33만5000원에 한국이동통신 주식을 인수해야 했다.


특혜시비를 차단하느라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인 4271억원을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쏟아 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선경 내부에서도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크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최 회장은 “이렇게 비싸게 사야 나중에 특혜시비가 일지 않는다. 회사가치는 앞으로 더 키워가면 된다”며 논란을 일축했다.


이후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인수 직후부터 통신기술 고도화에 집중했고 1996년 1월 세계 최초로 CDMA 기술을 디지털이동전화에 상용화에 성공했다. CDMA 방식은 세계표준으로 확산되면서 대한민국이 CDMA 기술 종주국이라는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SK텔레콤에 ‘특혜의 산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고 있으니 SK그룹으로서는 땅을 칠 만큼 억울한 일이다.


하이닉스, SK 아니었다면 쌍용차 꼴 났을 수도


SK하이닉스는 현재 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양대 축이자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양대 산맥이다.


하지만 SK그룹에 합류하기 이전까지 오랜 질곡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2001년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이래 증권 시장에서 투기 세력의 노름판으로 전락했고, 장기 워크아웃 상태에서 거대 부채를 안은 공룡 기업으로 매 정권마다 ‘뜨거운 감자’로 불렸다.


시황 사이클에 따라 실적 변동이 큰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하이닉스는 적기 투자와 불황을 버텨낼 체력을 갖춘 모기업 없이 독자 생존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2007년과 2010년 연이어 발발한 메모리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은 하이닉스를 더 큰 위기로 몰아넣었다. 경쟁자가 파산할 때까지 극단적 가격 인하 경쟁에 나서는 시장 상황에서 하이닉스에게는 뒤를 받쳐줄 든든한 배경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구원투수가 SK그룹이었다.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 LG반도체의 옛 주인인 현대중공업과 LG그룹이 발을 뺀 상태에서 2011년 SK와 STX가 하이닉스 인수전에 참여했고, STX가 중도 포기하면서 SK그룹 계열 SK텔레콤이 3조4267억원의 거액을 들여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당시만 해도 외부는 물론 SK그룹 내부적으로도 반대가 거셌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적자 기업을 왜 사들이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인수 이후에도 계속 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밑 빠진 독’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미래를 확신했고, 선대 회장으로부터 이어받은 ‘사업보국’ 정신으로 2위 반도체 기업을 한국에 남겨둬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잃지 않았다.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6 전경.ⓒSK하이닉스

SK그룹에 합류해 자금을 수혈 받은 하이닉스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업이 됐다.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다들 투자를 줄이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최 회장은 인수 직후인 2012년 SK하이닉스에 전년 대비 10% 증가한 3조9000억원을 투자했고, 2018년에는 사상 최대인 연간 17조원을 투자했다. 반도체 기술 경쟁력과 직결된 연구개발비도 인수 이전 2011년 8340억원에서 2013년 1조1440억원, 2016년 2조970억원, 2019년 3조1890억원으로 계속해서 늘렸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018년 매출 40조4000억원, 영업이익 20조8000억원이라는 역대최고 실적을 올렸다. 지난해에는 43조원의 매출로 최고 기록을 재경신했다.


하이닉스가 반도체 시장 불황기에 SK그룹으로 인수되지 못했다면 미래에 대비한 투자는 엄두도 못 내고 청산 위기까지 내몰린 지금의 쌍용자동차 꼴이 났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오랜 워크아웃을 경험한 거대 부채 기업이자, 한때 정부와 채권단에 의해 해외 기업에 매각될 뻔한 SK하이닉스를 국내 반도체 산업을 지탱하는 양대 축으로 되살린 것은 최태원 회장의 뚝심이자 대를 이어 지켜온 ‘산업보국’ 정신이었다.


M&A로 몸집만 키웠다?…"산업 패러다임 전환 고려한 전략적 투자"


SK그룹은 재계 서열 2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제조업체를 인수해 몸집만 키웠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보여준 성장전략을 살펴보면 미래 산업 패러다임 변화를 내다본 치밀한 전략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 인수 이후 메모리반도체 생산능력 확충은 물론, 관련 생태계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공급망 교란 상황에 대비했다.


SK하이닉스는 2012년 청주 M12를 시작으로 2015년 M14(이천), 2018년 M15(청주), 2021년 M16(이천)등 55조원을 투자해 국내에 축구장 29개 크기의 반도체 공장 4개를 증설했다.


여기에 반도체용 특수가스(SK머티리얼즈)와 웨이퍼(SK실트론)회사를 인수한 뒤 집중적인 투자를 단행, 반도체 연관제품을 전략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경기도 용인시에는 SK하이닉스와 50여개 소재, 부품, 장비 협력업체와 연구소 등이 참여하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SK온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중인 배터리 공장. ⓒSK이노베이션

탄소중립, 전기차 시대에 새로운 ‘산업의 쌀’로 부상하고 있는 배터리도 SK그룹이 그동안 주력으로 투자해온 분야다.


SK온은 미국 조지아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 2곳을 보유하고 있으며, 포드와 합작해 2025년까지 테네시와 켄터키에 공장 3곳을 추가할 예정이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 SK온의 배터리 생산규모는 150.5GWh로 미국 내에서 배터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기업이 된다.


SK온을 비롯, 국내 배터리 3사가 미국에서 계획하고 있는 생산설비가 예정대로 완공되면 K배터리가 미국 전체 생산설비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경쟁력이 강화된다. 동시에 친환경 에너지를 중시하는 미국의 그린 뉴딜 정책을 지원하는 측면이 있어 국가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SK는 단순히 특정 기업만의 성장이 아니라 국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성장을 고려한 사업보국 경영을 펼쳐왔다”면서 “앞으로도 새로운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주주와 투자자, 지역사회, 국가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성장하는 경영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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