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후 외화 LCR 악화 뚜렷
美 금리 인상 속도에 불안 확대
국내 은행의 외화 유동성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눈에 띄게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금융 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외화 유출 위험이 계속 커지고 있지만, 위기 대응을 위한 자산 확보는 이를 뒤따르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런 와중 미국의 가파른 금리 인상 등으로 안팎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자, 결국 금융당국이 은행권을 상대로 외화 건전성 개선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다.
12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IBK기업은행 등 국내 6대 은행의 지난해 말 평균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은 107.6%로,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직전인 2019년 말과 비교해 12.7%p 떨어졌다.
이처럼 은행들의 외화 LCR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만큼 외환 위험 발생에 대한 대비 수준이 이전보다 나빠졌다는 의미다. 해당 수치는 기준 시점으로부터 향후 1개월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외화 순유출 규모와 비교해 현금이나 지급준비금, 고(高)신용채권 등 유동성이 높은 외화 자산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은행별로 보면 우선 농협은행의 외화 LCR이 98.7%로 같은 기간 대비 6.3%p 하락하며 조사 대상 은행 중 최저를 기록했다. 이는 확보하고 있는 고유동성 외화 자산이 최악의 경우 한 달 동안 빠져나갈 수 있는 외화량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국민은행 역시 108.1%로, 우리은행도 108.6%로 각각 0.1%p와 3.8%p씩 해당 수치가 낮아졌다. 하나은행은 109.4%로, 기업은행은 109.8%로 각각 45.0%p와 25.4%p씩 외화 LCR이 급락했다. 신한은행의 외화 LCR만 110.8%로 4.2%p 상승했다.
은행권의 전반적인 외환 리스크 악화를 둘러싸고 우려가 커지는 이유는 글로벌 금융 시장의 불확실성이 확산되고 있어서다. 코로나19 장기화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선진국의 경기 둔화와 신흥국의 디폴트 위험 확대는 잠재적 악재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불안 요인은 코로나19 연착륙 과정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 연준은 이번 달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정례회의에서 한 번에 기준금리를 0.50%p 인상하는 이른바 빅 스텝을 단행했다. 이로써 미국 기준금리는 0.75~1.00%까지 높아졌다.
문제는 연준이 연내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달 이후 몇 차례만 0.25%p 또는 0.5%p씩 금리를 높이면 수개월 사이에 현재 1.50%인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역전할 수 있다.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 입장에서는 기준금리 수준이 미국과 같거나 높더라도 차이가 크지 않으면, 외국인 자금 유출과 급격한 원화 가치 하락 등에 직면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결국 금융감독원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정은보 금감원장은 지난 3일 은행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아직은 은행의 외화조달 여건이나 외화유동성 상황이 안정적으로 보이나, 미국 금리 인상 등 시장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긴장의 끈을 늦추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금감원에서는 은행의 외화 유동성 관리 능력과 국가별 익스포저 한도 관리의 적정성을 점검하고, 취약부문 발견 시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고 강조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당분간 국내외 기준금리를 둘러싼 변동성이 큰 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은행권 입장에서는 선제적이고 보수적인 외화 유동성 관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