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상황 속 고급차, RV 위주 신차 출시로 수익성 대폭 개선
권역별 책임경영체제 등 스마트한 조직 문화로 신속한 의사결정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오너 3세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룹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인물로 꼽힌다. 그가 회장에 취임한 2020년 10월 14일은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그룹의 주력인 자동차 산업 역시 팬데믹 장기화 우려 속에 주요 시장에서 락다운 조치가 이뤄지는 등 심하게 위축된 상황이었다.
‘소나기는 피해 가라’는 말이 있다. 대외 환경이 불확실할수록 잔뜩 웅크린 채 상황이 개선되길 기다리는 게 기업의 보편적인 생리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도 잇달아 긴축 정책을 발표하며 동면(冬眠)에 들어갔다.
지난해 신차 ‘슈퍼사이클’을 맞은 현대차와 기아 역시 신차 출시 타이밍을 늦출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현대차와 기아는 통상 5~6년 주기로 풀체인지(완전변경)를 진행해 왔으며, 공교롭게도 국내외 시장에서 판매량이 많은 볼륨 모델들의 풀체인지 주기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집중된 것이다.
신차 효과를 극대화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한 타이밍 쉬어가는 것도 방법이다. 시장에서는 현대차그룹도 그런 방법을 택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정공법을 택했다. 단순히 소나기를 피해가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소나기가 그친 뒤 가장 먼저 치고 나갈 수 있도록 엔진의 rpm(회전수)을 높게 유지했다.
정 회장은 지난해 3월 현대차그룹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코로나19 영향으로 일시적인 사업 차질은 불가피하겠지만 다양한 컨틴전시 계획을 수립해 당면한 위기 극복은 물론 이후에도 조기에 경영 안정을 이룰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일사불란하게 비상 대응에 최선을 다하면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그룹의 기초체력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현대차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신형 투싼, 아반떼, 스타리아, 제네시스 G80, GV70, 등 신차들을 예정된 스케줄대로 출시했다. 기아 역시 쏘렌토, 카니발, K8 등 볼륨 차급에서 신차를 시장에 내놨다.
올해 들어서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기반의 브랜드별 선도 모델들인 현대차 아이오닉 5, 기아 EV6, 제네시스 GV60을 잇달아 출시했다.
지난해 국내 출시된 신차들은 현대차와 기아가 개별소비세 인하 효과로 상대적으로 시장 상황이 좋았던 내수 시장에서 높은 실적을 올리며 위기를 버텨내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올해 들어서는 해외 시장에 잇달아 출시되며 자동차 수요 회복 흐름을 타고 실적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고급차 브랜드인 제네시스의 라인업 확충과 대중차 브랜드 현대차‧기아의 RV 비중 확대는 양적 성장보다 수익성 위주의 체질 개선이라는 긍정적인 효과까지 가져왔다.
현대차는 올해 상반기 전세계 시장에서 전년 동기 대비 26.4% 증가한 203만1193대를 판매했다. 이 기간 매출(57조7170억원)은 22.3%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무려 143.6%나 증가한 3조546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 3.1%에 불과했던 매출 대비 영업이익률은 6.1%로 두 배 가까이 끌어올렸다.
기아 역시 판매와 매출에서 상당한 회복력을 보였으나, 영업이익 증가율은 이를 훨씬 상회했다. 상반기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24.0% 증가한 144만4107대였고, 매출은 34.6% 증가한 34조9212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334.8%나 증가하면서 영업이익률 7.3%를 기록했다.
마치 정체 상황에서 저단 기어로 높은 엔진 회전수를 유지한 채 벼르다, 정체가 풀리자 급가속으로 튀어나가는 듯한 모습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지난해와 올해 세계 주요 시장에 연이어 출시된 신차들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판매량 확대는 물론 판매믹스 개선 효과까지 있었다”면서 “반도체 수급 차질과 환율 등 대외 악재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팬데믹 상황에 경쟁사 대비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정 회장 취임 이후 한층 스마트해진 조직문화를 바탕으로 한 ‘신속한 의사결정’이 꼽힌다.
정 회장은 수석부회장으로 그룹을 총괄하던 시절부터 도입한 ‘권역별 책임경영체제’를 회장 취임 이후 더욱 강화했다.
주요 권역별로 시장 상황에 맞게 대응 전략을 수립하고 신속하게 실행하는 체제가 구축되면서 현대차와 기아는 코로나19에 따른 국가별 락다운 등 방역조치와 공장별 부품 수급현황 등 생산차질 상황에 최적화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이는 미국과 유럽, 인도 등 주요 시장에서의 호실적으로 이어졌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전체를 움직이는 전략적 판단은 정의선 회장을 비롯한 양재동 본사에서 컨트롤하지만, 각 브랜드나 지역별 사업과 관련해서는 적재적소에 적합한 인재를 투입해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의 정 회장 특유의 용병술이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