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유전자원센터, 11개 국가 자원 관리
오이・상추 등 신품종 개발도 속도
유전자원은 ‘국력’…100년 보존 가능
#. 농사직설은 조선 세종 때 문신인 정초, 변효문 등이 편찬한 농서다. 1429년에 관찬으로 간행해 이듬해 각 도 감사와 주, 부, 군, 현 및 경중 2품 이상에서 나눠줬다. ‘新농사직썰’은 현대판 농업기법인 ‘디지털 농업’을 기반으로 한 데일리안 연중 기획이다. 새로운 농업기법을 쉽게 소개하는 코너다. 디지털 시스템과 함께 발전하는 농업의 생생한 현장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 주>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 이야기다. 농업유전자원센터(이하 센터)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설이다. 국가 기밀시설인데다 영하 20℃에서 100년 보존이 가능한 시설은 인간이 직접 관리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유전자원은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특히 세계적 이상기후현상으로 식량부족 현상이 수면위로 떠오른 현재 상황에서 유전자원 보존은 어느때보다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최근에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종자전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모양새다. 유전자원 확보가 그 국가의 국력과 비례한다는 시각도 지배적이다. 그만큼 유전자원은 미래 세대에게 중요한 자산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세계 3087종 26만3131 자원의 거대 ‘냉동고’
농업유전자원은 현재는 물론 미래의 농업 및 식량생산에 활용되는 유용한 유전소재로서 보존가치가 있는 종자, 미생물, 곤충 등의 생물체를 총칭한다. 환경파괴와 오염에 따른 근연 야생종 소멸 및 육성품종 재배면적 확대로 유용한 재래종의 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농업유전자원의 확보와 보존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된 상황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농업유전자원 국가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센터는 국제규격 첨단 농업유전자원 저장시설(종자은행)을 전주와 수원에 두고 있다. 이곳에서 보존되는 자원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소위 거대 ‘냉동고’를 연상케 한다.
식물유전자원 1599종 23만7043자원, 영양체 자원 1488종 2만6088자원 등 모두 3087종 26만3131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 및 국제기구 등 협력으로 국내외 토종, 야생종 유전자원을 수집·확보한 결과다.
국내에서는 국제쟁점에 대비하기 위해 토종유전자원을 수집대상으로 선정하고 국외유전자원은 병충해저항성, 기후변화대비 생물, 비생물 스트레스 저항성 자원 등 유용자원을 중심으로 선정·수집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토종인 야생종, 재래종 등 5만4839자원은 꼭 지켜야할 유전자원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 자원은 나고야의정서 등 국제조약으로 유전자원 도입과 활용 제한이 국제쟁점으로 부각되는 시점에서 국제적으로 자원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전자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방대한 유전자원 확보로 센터는 세계 5위 수준에 이름을 올렸다. 안전성 측면에서 국제기구로부터 세계종자보존소로 인정을 받아 11개국의 2만 자원이 센터에 저장돼 있는 것이다.
농진청 종자은행(전주·수원)은 리히터 규모 7의 강도에 견딜 수 있게 건축됐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4대 사고에 보존했던 것처럼 전주와 수원에 위치한 농진청 종자은행과 봉화에 위치한 산림청 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에 3중복보존함으로써 기후변화나 환경변화, 재난 등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도 토종자원 2만3000여 자원을 블랙박스 형태로 중복 보존해 국내·외에 4중복보존 시스템을 구축했다.
종자은행 중기저장고는 4℃에서 30년, 장기저장고는 영하 20℃에서 100년 보존이 가능하다. 또 영하 196℃ 초저온에서 동결하는 기술로 마늘, 사과 등 7작물, 1558자원을 보존하고 있다. 영양체 유전자원 안전보존 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유전자원을 수집하는 것만큼이나 보존·활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지난 2015년 시리아에서 내전으로 인해 유실된 종자를 복구하기 위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서 인출한 사례가 있었다. 만약 유전자원을 안전하게 보존하지 않았더라면 유실됐던 종자를 다시 싹틔울 수 없었을 것이다. 유전자원 보존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던 사례로 꼽힌다.
◆육종농가와 상생…그리고 신품종 개발
센터는 세계적인 종자은행 역할과 더불어 육종농가와 상생에도 앞장서고 있다. 종자를 활용한 신품종 개발이 핵심이다. 센터는 매년 유전자원 현장평가회를 통해 육종농가,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품종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밀, 상추, 오이가 현장평가회를 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다양한 종자 연구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밀은 지난 2019년 기준 국내 자급률이 1% 미만에 그치는 품종이다. 수입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의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30년 밀 자급률 10% 달성을 목표로 신품종 개발 등 중장기 계획을 추진 중이다.
지난 5월 센터에서 열린 밀 유전자원 평가회에서는 42개 나라에서 수집한 밀 1000여 자원을 놓고 신품종 육성과 연구에 활용할 자원을 선발했다.
전시된 밀 유전자원은 출수기, 이삭길이 등 주요 농업형질이 다양하게 분포되도록 선발된 자원들과 한국 재배환경에 적응력이 우수하다고 예상되는 자원 등이다. 센터는 자원 특성을 쉽게 비교해 우수자원을 선발하도록 금강밀, 조경밀 등 대조품종을 같이 재배하고 있다.
이주희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센터장은 “우리밀 신품종 개발과 밀 자급률 향상을 위한 연구 소재가 발견, 활용돼 국내 식량안보 연구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다양한 유전자원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상추는 샐러드, 쌈채, 녹즙 등으로 즐겨 먹는 배추 다음가는 경제작물이다. 2019년 국내 상추 재배면적은 3629ha, 생산량은 9만5580t, 생산액은 2973억원이다. 잎채소 총 생산액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다.
센터는 78개 국가에서 수집한 2337 상추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매년 수요자 요구를 반영해 병에 강하거나시장 선호도가 높은 품종, 야생종 등 다양한 유전자원을 확보하고있다.
올해 현장 평가회에서는 센터에서 보유한 상추 유전자원 중 42개 국가에서 들여온 400여 자원을 대상으로 열렸다. 양상추, 잎상추, 가시상추 등 다양한 형태의 상추를 비롯해 연녹색부터 짙은 자색 상추를 선보였다.
특히 전남도농업기술원이 토종 상추를 활용해 육성한 숙면채 상추 ‘흑하랑’과 노균병 판별지표로 활용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도입돼 병 저항성 육종 소재로 활용되는 품종 등 독특한 상추도 공개됐다.
이 센터장은 “최근 농업유전자원센터가 보유하고 있는 2337 상추 유전자원의 다양성을 함축하는 핵심 집단 조성 연구가 시작됐다”며 “앞으로도 세계 각국 종자은행과 협력해 수요자가 원하는 유전자원을 지속적으로 도입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에는 오이가 처음으로 단독 현장 평가회를 개최했다. 호박 등 박과에서는 이례적으로 오이 단일 품종이 평가회에 등장한 것이다. 센터는 이날 미국, 러시아,조지아, 베트남 등 42개 국가에서 수집한 447 오이 자원이 소개됐다.
오이 우수품종을 개발하는 안남주 대표(대농씨드)는 “해외 오이유전자원 도입과 우수자원 선발은 신품종 육종에 큰 도움이 된다”며 “디지털 육종을 위한 유용자원 데이터베이스(DB) 구축과활용이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늙어가는 지구…국가 차원 유전자원 관심 필요
최근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는 이상기후 현상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가 창궐한 시기에도 미국과 유럽은 코로나19보다 이상기후현상이 미래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꼽았다. 그만큼 지구의 노화는 더 이상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이상기후현상은 식량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나라만 봐도 사과 재배는 점점 북상하는 추세다. 남부지방에서는 열대 과일을 심심치 않게 보고 있다. 국지성 집중호우로 농작물 피해도 적지 않다.
식량의 안정적인 수급은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 밥상에 오르는 식량의 시작점은 종자다. 이 종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유전자원 확보와 보존이 필수다. 세계 각국 유전자원 확보를 위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배경인 셈이다.
박교선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인삼특작부 부장(전 농업유전자원센터장)은 지난 1월 농촌진흥청 매거진 인터뷰에서 기후변화와 유전자원의 연관성을 의미 있게 해석했다.
박 부장은 “현재 지구온난화에 따라 여름철 고온 및 집중호우 등 이상 기상에 견디는 아열대·열대 유전자원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다”며 “유전자원이 다양해야 기후변화로 인한 다양한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품종 개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유전자원은)식품소재 뿐 아니라 신약 개발을 위한 소재에도 활용되기 때문에 농업유전자원센터는 물론 민관 협력을 통해 농업유전자원을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연구를 지속해야 한다”며 “앞으로도 기후변화 등 글로벌 위기상황에서 농업유전자원을 국가 종자주권 확보 및 생명산업 신성장동력 핵심자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8월 26일 [新농사직썰⑥]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