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사회’는 100년 전 소설이다. 1921년에 발표된 작가 현진건의 단편으로, “사회가 술을 권한다”는 핑계 아닌 핑계 아래 날마다 술을 마시는 일제 치하 지성인의 푸념이 담겼다.
고교 시절 소설을 읽었을 때보다는 군부정권 시절 대학생이 된 뒤 무척 공감하며 술을 벗 삼곤 했다. 하필 직업도 기자여서 마치 주량이 취재력인 것처럼 생각하며 하루가 멀게 술을 마시던 때가 있었다.
술은 좋은 친구를 사귀는 계기도 되지만 여러 실수와 사고를 부른다. 특히, 연예 분야 취재를 하면서 지금 돌아보면 못나도 참 못난 실수를 종종 했다. 주로 배우나 감독과의 설전이었다. 곧바로 혹은 후일 미안한 마음을 전한 이도 있고 그 뒤로 만날 기회도 연락처도 없어 사과하지 못한 이도 있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의 뜻을 표한다.
배우 김성균은 그중에서 가장 미안한 사람이다. 그나마 연기론이나 작가론을 놓고 언쟁한 것은 상대와 펀치를 주고받은 것이지만 김성균에게는 일방적으로 말의 주먹을 날렸다. 이유도 정말 부끄러울 만큼 시시하게 ‘술’이었다.
5년 전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지난해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영향권에 들면서 영화인들과의 자리는 거의 힘들어진 요즘이지만. 과거엔 영화 시사회가 끝난 뒤 ‘미디어데이’라고 해서 배우와 감독, 기자 등이 맥주 한잔하며 오늘 본 영화에 관해 얘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더 진솔하게 사담을 나누기도 했고. 흥행이 잘된 작품이 있으면 ‘500만 파티’ ‘1000만 파티’를 열어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사적 자리의 행운도 주어졌다. 서울 삼청동에서 인터뷰가 있는 날, 요즘처럼 대규모 라운드가 아니라(최근엔 그마저도 대면이 아닌 온라인 인터뷰로 바뀌었지만) 1:1대로 진행되던 그때. 점심시간 직전에 인터뷰가 끝났을 때, ‘아직 할 얘기가 더 남으신 것 같은데 점심 드시며 얘기 이어가실래요?’라고 말하는 배우가 있기도 하고. 그날의 마지막 인터뷰가 끝났을 때 ‘약속 없으면 저녁 드시며 영화 얘기 더할까요?’라고 말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있기도 했다.
김성균과의 자리는 10년 전 어느 날, 모 배우와의 삼청동 인터뷰가 있던 날이었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행운을 누린 날이었다. 그 배우는 김성균이라는 배우를 알아두면 좋을 거라며, 곧 단발머리 휘날리며(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박창우 역) 잘될 배우라고 칭찬하고 덕담하며 ‘번개’로 초청했다. 먼저 잘된 선배로서 후배를 응원하고자 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김성균이 도착했을 때 필자는 취해 있었다. 딴에는 반가운 마음에 ‘술을 권했고’, 김성균은 거절했다. 그리고 크나큰 실수를 했다. 이 자리에 온 것 자체가 술 마시겠다는 동의가 전제된 것도 아닌데, 강권했다. 김성균은 단호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한약을 지어줬고, 그 정성과 마음을 알기에 약 먹는 동안에는 금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도 어리기 때문에 밤이면 육아도 나눠야 해서 술을 마시고 귀가하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쯤 되면 멈춰야 마땅하다. 대취해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필자는 강권했다. 지금도 쥐구멍을 찾고 싶은 못나고도 나쁜 행동이었고, 첫 만남을 망쳤다. 이후 김성균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사과하고도 여전히 마음에 미안함이 남아 있다. 이번에 영화 ‘싱크홀’로 온라인 인터뷰를 진행한 뒤에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김성균은 예전 그때처럼 똑같이 ‘뭘 그런 일을 마음에 담아 두시느냐. 그래도 그렇게 한잔할 수 있었던 시절이 좋은 추억’이라며 넉넉한 용서를 보였다.
종료한 ‘메모리즈’ 문패를 다시 꺼내 개인사적 에피소드를 전한 이유가 있다. 영화 ‘싱크홀’(감독 김지훈, 제작 ㈜더타워픽쳐스, 배급 ㈜쇼박스)에서 배우 김성균이 한 연기의 진정성에 관해 말하고 싶어서다.
배우 김성균은 결혼 11년 만에 어렵사리 서울 외곽 다가구주택(빌라)에 자가를 마련한 박동원 과장을 연기했다.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의 박동원은 집에서는 아내와 아들의 태양이고 회사에서는 후배들과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친근한 상사다. 아래층 정만수(차승원 분)과 티격태격하면서도 형으로 깍듯이 모시고, 이웃들과도 잘 지내려는 친절한 이웃이다.
특히, 힘겹게 마련한 ‘우리 집’에 대한 애착이 크다. 한편으로는 집의 수평이 맞지 않은 문제를 조사하고 공론화기도 하고, 다른 쪽으로는 김승현(이광수 분)을 비롯해 회사 후배들에게 짐짓 부실 공사를 모른 척하며 집들이를 벌이고 ‘방 많으니 자고 가라’ ‘갈 거면 택시비 다 주겠다’, 으쓱하는 허세도 있다.
정말 우리 옆집에 살 것 같은 인물로 실감 나게 연기한 배우 김성균은 아내 영이로 등장하는 배우 권소현과도 ‘진짜 부부’ 같은 앙상블을 선보인다. 연기 잘하는 두 배우의 뛰어난 호흡의 결과다. 엄마 아빠가 기둥을 잘 세우니 귀여운 아들 수찬(김건우 분)까지 더해 단란한 세 식구로 보인다.
일차적으로 호연 덕분이지만 더불어, ‘정말 저렇게 오순도순 다감하게 살겠지’ 싶은 사람 김성균에 대한 믿음이 연기의 진정성을 배가시킨다. 못난 기자가 술을 권해도 배우로서가 아니라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거절할 줄 아는 김성균 아닌가. 아직은 무명 시절이었음에도 무엇이 중요한가의 가치 판단이 가족에 있던 사람이다.
그 진정성이 최고점에 이르는 장면이 영화 ‘싱크홀’ 안에 있다. 우리 집이 500m 아래 싱크홀로 빠져버린 엄청난 재난 상황을 결코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그려낸 영화에서 뜨거운 눈물을 길어 올리는 장면이 김성균에게 맡겨졌는데, 진한 부성애로 감동을 빚어냈다. 실제로 세 아이를 키우는 다둥이 아빠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공기 좋은 마을에서 사는 김성균이기에 부성애 장면이 단지 연기로만 느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사람 김성균의 실제 경험이 배우 김성균 연기의 진정성을 높인 사례가 하나 더 있다. 김성균은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에서 살다가 지상에 처음으로 집을 샀을 때, 아이들과 함께 신나 했다. 너무 기뻐서 장판도 없고, 가구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집에 혼자 이불 베개 들고 가서 잤다.
내 집 마련의 기쁨을 아는 김성균이기에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한 집을 산 박동원 과장의 설렘과 행복을 알고, 한순간에 집이 추락한 절망과 황망함도 알 것이다. 제대로 공감하고 연기하니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진짜 연기가 나온다.
배우 하정우가 영화 ‘추격자’ 당시 인터뷰에서 “김윤석 선배를 만나보니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이구나, 를 깨달았다”며 지침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누구랄 것 없이 어느 배우에게나 해당하는 말일진대, 배우 김성균은 이미 그 길을 가고 있다.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연기가 나온다. 오늘(11일) 개봉하는 ‘싱크홀’을 볼 이유는 아주 많지만, 강렬함을 벗고 평범함으로 다가선 배우 김성균의 연기 인생 2막을 지켜보는 의미도 깊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