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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㉙] 우리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을까?


입력 2021.05.18 14:00 수정 2021.05.18 10:09        데스크 (desk@dailian.co.kr)

안중근 의사 기념관 ⓒ필자 촬영

올해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1주년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 장관과 회담 후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한 손으로 브라우닝 권총을 들고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을 쐈다. 한 발은 우측 팔 상박에, 나머지 두 발은 옆구리와 복부에 맞았다. 치명상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나머지 세 발을 옆에 있던 일본인들을 향해 쐈다. 그리고 러시아 군인들이 그를 체포했다. 이때 그는 “코레아 우라!” 즉 “한국 만세”라고 외쳤다. 그의 총에는 아직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왜 한 발이 남아 있었을까? 흔히 이를 두고 자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그가 가톨릭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자결을 결심한 것은 납득하기 힘든 내용이다. 이렇게 의문을 갖고 살펴보니 그 당시 안중근 의사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그다지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많은 것이 궁금했다.


우선 그가 한 손으로 총을 쐈을까 하는 의문이다. 필자의 군 생활 당시 기본화기가 권총이라 기본적으로 권총사격을 했다. 그때 폼 좀 잡아보겠다고 원 핸드 그립 즉, 서서 한 손 쏘기를 한두 번 해봤지만, 25m 거리의 표적조차도 거의 맞힐 수 없었다. 필자에게 지급된 K-5 권총은 한 손으로 쏘기에는 일단 손잡이가 컸고, 무게와 사격 시 반동 역시 상당했다. 첫 발은 정조준하여 쏜다 해도, 연속해서 같은 표적에 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안중근은 여섯 발을 한 손으로 연속해서 쏘았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은식은 이에 대해 “권총 여섯 발을 연달아 쏘았는데, 헛방 없이 모두 명중시켰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는 중근의 담력과 사격술이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극찬했다. 그런데 정말 그러했을까?


하얼빈 의거 당시의 사진이 없는 상황에서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 등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안중근 의사는 서서 한 손 쏘기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때 권총 사격을 어떻게 했는지 관련 교범을 찾아보았다. 실제로 대부분이 서서 한 손 쏘기 자세였다. 사격 방법도 바로 서서 오른팔을 쭉 펴고,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시선과 조준선 그리고 표적을 일치시킨 후 사격한다고 되어 있다. 다만 조준이 어려울 경우 팔과 손목을 조금 구부려 눈과 권총의 거리를 가깝게 하여 사격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때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권총 사격 방법ⓒSmall Arms Firing Regulations For the United Stated Army and for the Organized Militia of the United States, 1908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권총의 조준과 반동 때문에 사격이 쉽지 않다. 최근에는 교범 역시 권총을 두 손으로 잡는 형태로 바뀌었다. 문제는 당시 브라우닝 권총의 손잡이 부분이 두 손으로 잡기에는 K-5 권총과 달리 너무 작아 한 손 쏘기에 적합한 크기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안중근 의사는 한 손으로 권총을 잡고 쏘았다. 그런데 교범의 묘사와 다른 점이 있었다. 원래라면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어야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좀 더 정확히 쏘기 위해서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러시아 검사는 “나(러시아 검사)는 다른 사람과 함께 발사한 곳으로 달려갔는데 범인으로 보이는 자가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치고 한 발을 의장병의 전면을 지나고 있던 공작을 향해 쏘았다”라고 증언했다. 즉 안중근 의사는 한 손 쏘기와 두 손 쏘기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으며,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안정된 자세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손으로 연속하여 쐈음에도 불구하고 명중률이 높아질 수 있었다. 단순히 그가 담대하고 사격술이 뛰어났던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연구에서 안중근 의사를 총에 대해서 대단한 전문가라고 묘사하고, 그가 총에 매우 익숙한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어렸을 적부터 총을 사용하여 익숙하더라도, 흔히 이야기하듯 운전을 능숙하게 한다고 차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가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그가 열일곱, 열여덟 무렵 친구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총에 탄환이 걸리자, 쇠꼬챙이로 총구멍을 뚫으려고 주저 없이 마구 쑤셨다고 회상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결과로 탄환이 지연 폭발하면서, 쇠꼬챙이와 함께 자신의 오른손을 관통했다는 것이다.


총구로 탄환을 넣었다는 표현을 봐서는 당시 그가 사용한 총은 전장식 소총 즉, 조총으로 보인다. 만약 총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라면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한 후 조치했을 것이다. 이런 안전 조치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구멍을 뚫기 위해 쇠꼬챙이로 마구 쑤셨다는 것은 그가 총이 익숙할지는 모르지만,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총기, 특히 권총을 익숙하게 다루었던 것 같다. 역시 ‘안응칠 역사’에서 청나라 의사 서가라는 사람과의 일화를 살펴보면 안중근 의사는 서가가 칼로 위협하자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대응했다. 이를 보면 안중근 의사는 평상시에도 권총을 가지고 다녔고, 능숙하게 다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박은식이 이야기하듯 ‘담력과 사격술이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나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은식이 강조한 담대함 역시 마찬가지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쏜 총탄 수는 총 세 발이고, 전체 발사한 총탄은 여섯 발이었다. 그런데 ‘안응칠 역사’에서는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에 대해“‘저것이 틀림없이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단총을 뽑아 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네 발을 쏘았다. 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의아심이 크게 일어났다. 내가 이토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쏘았다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뒤쪽을 향해 다시 총을 겨누었다. 걸어 나오는 일본인들 중에서 가장 위엄이 있어 보이는 앞장선 자를 향해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만일 죄 없는 자를 쏘았다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달려온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라고 서술했다. 즉 이토에게 네 발을 쏘고, 그의 수행원에게 세 발을 쏘았다는 것이다.


반면 재판 중 진술에서는 “내가 러시아 병대의 대열 중간쯤의 지점으로 갔을 때, 이토는 그 앞에 열 지어 있던 영사단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병대의 열 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있던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 십 보 남짓의 거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상박부를 노리고 세 발 정도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뒤쪽에도 또 사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이토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쪽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라고 했다. 즉, 이토에게 세 발을 쏘고, 그의 수행원에게 두 발을 쐈다는 것이다.


두 진술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의 숫자가 차이가 난다. ‘안응칠 역사’에서는 총 7발, 재판 진술은 총 5발로 서로 엇갈린다. 실제로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 그의 수행원에게 세 발 이렇게 총 여섯 발을 쏘았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했을까? 일부에서는 당시 안중근 의사 역시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만일 그가 사격과 전투에 능숙하고 담대하다면 그런 중요한 상황에 경황이 없다는 이유로 착각 따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투 중 남아 있는 탄환의 수를 기억하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안중근 의사를 ‘천하에 둘도 없는 초월적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말 그대로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적 행위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초월적 존재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그의 주장처럼 가족과 동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애쓰던 의병 중 한 명이었고, 진정 그가 항상 이야기하던 ‘대한인’ 중 한 명이었다. 의거 당시 굳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섰지만, 그 역시 경황이 없을 정도로 무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야만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결국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초월적 존재인 영웅 안중근보다, 의병이자 대한인이었던 안중근을 바라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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