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번째 올드 무비로 애쉬튼 커쳐 주연의 ‘나비효과’를 소개하면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인생은 B(birth, 출생)와 D(death, 사망) 사이의 C(choice, 선택)이며 나는 그 결정의 결과다”.
틀림없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가르는 기준이랄까 선택에 관여하는 변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금 하고 싶은 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라, 내가 그것을 선택하기도 하고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무엇’이 무엇인지. 경제력과 시간의 여유가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내가 처한 환경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 요건들이 충족된다면, 내 의지만 있으면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무엇이 큰 영향을 미칠까.
개인적으로, 세계관 그다음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떻게 선택하고 행동할지의 문제는 철학의 영역이다. 인생관 혹은 세계관은 아주 작은 선택에도 보이지 않게 관여한다. 좀 더 눈에 보이게 내 인생의 사사건건에 개입하는 건 취향이다. 어떤 집이나 차를 살지, 소파는 어떤 것으로 할지, 벽지는 무슨 색깔로 할지, 아니 사지 않고 바꾸지 않을지에도 각각에 대한 취향이 개입한다. 물건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과 교제를 시작할지 헤어질지, 결혼할지 말지의 선택에도 내 취향에 맞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흔히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도 하고, 이타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을 훌륭하다고 얘기하긴 해도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을 심히 비난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취향에는 정답이 있을까. 뭘 살지 말지, 무엇을 할지 말지 “그건 내 맘이야”라는 말에는 정답을 향한 거부가 담겨 있다. 하지만 “걘 좀 취향이 별로야”라는 말에는 나와 취향이 맞지 않는다는 뜻을 넘어 수준이 낮다는 의미가 깔린 경우가 왕왕 있다. 반대로 “그 사람은 취향이 고상해”라는 말에는 상대의 취향에 대한 호평 또는 경외심이 담겨 있다. 상대의 취향을 두고 고급과 저급의 기준을 우리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향’이라는 말에는 상당히 문화적 교양과 지적 면모가 내포돼 있다. 복권 당첨이든 다른 방법으로든 빠른 속도로 부자가 될 수는 있어도 하루아침에 문화적 소양이나 지식을 쌓을 순 없다. 말 그대로 돈은 가지면 되지만 취향은 쌓아야 내 것이 된다.
여기 돈은 충분하나 취향은 없는 남자가 있다. 카스텔라는 꽤 유망한 공장의 사장이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아내 앙젤리끄는 집을 온통 분홍과 꽃무늬로 가득 채워 놓았고, 동물을 사랑하며, 배우가 연기를 잘해도 조잡한 의상을 입힌 연극은 싫어한다. 남편 카스텔라로 말할 것 같으면 연극을 보러 간 적도 없고 책을 읽지도 않고, 건강을 생각하라는 아내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식탐이 있다.
“왜 간다고 했을까”, 후회와 귀찮음을 안고 조카가 단역으로 나온다는 연극 ‘베레니스’를 아내와 보러 간 어느 날. 나가서 뭘 사 먹고 끝날 때쯤 들어올 궁리를 하던 카스텔라가 한순간 눈물을 흘린다. ‘베레니스’는 1670년 세상에 나온, 장 바티스트 라신의 정념비극으로 로마 장군 티투스와 유대 공주 베레니스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사랑하지만, 티투스가 장차 로마 황제로 임명되어 정치적 입지 속에서 다른 여인을 황후로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된다. “공주, 우린 이제 헤어져야 하오”라는 티투스의 이별 선언에 베레니스는 처절하게 울먹이며 토로한다.
“잔인한 사람, 내 심장을 찢는군요. 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나 혼자만의 사랑이 됐군요. 이미 다 알고 있던 일 아닌가요. 날 사랑의 열병에 몰아넣고 당신이 말했죠. ‘불쌍한 공주, 뭘 기대하는 거요? 당신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오’. 제 마음은 당신만을 원해요. 황제는 우리를 떼어놓으려 했죠. 그래도 우린 저항할 수 있어요. 그렇게 했다면 훨씬 위로가 되었을 텐데. 내가 죽는다면 당신 아버지와 백성, 황제와 원로회 탓일 뿐, 당신 탓은 절대 아니에요.”
티투스는 사랑을 버리고 황제의 지위를 택했다. 실연당한 여인의 대명사 베레니스의 통곡에 카스텔라도 운다. 연극 한 번 본 적 없는 카스텔라지만 명작의 애절함에, 베레니스의 비극적 사랑에, 베레니스를 연기하는 클라라의 명연에 몰입해 눈물짓는다. 평소 고급 취향임을 자부하는 아내가 “저 여자 웃긴다”라고 옆에서 이죽거려도 베레니스, 클라라에게서 눈을 못 뗀다.
사실 클라라는 얼마 전 카스텔라의 영어 선생님으로 면접을 왔던 사람이었다. 카스텔라는 홀로 연극을 보러 극장을 다시 찾는다. 하필 마지막 공연, 카스텔라는 분장실을 찾는다. 클라라의 연기에 찬사를 보내고픈 카스텔라, 그의 몇 마디 말의 마디마디를 끊으며 여러 사람이 클라라에게 호평과 인사를 전한다. 카스텔라는 겨우겨우 “굉장했다”는 말로 자신의 문장을 끝내지만, 돌아오는 클라라의 반응을 냉랭하다. 클라라와 그의 연기를 향한 카스텔라의 진심보다는 면접 때부터 느낀 ‘취향이 고급지지 않다’는 선입견과 “나는 연극을 본 적 없는데”라는 첫 구절을 크게 느낀 듯한 표정이다.
클라라에게 호감을 느낀 카스텔라는 연극하고 미술 하는 클라라의 친구들에게 밥도 사고,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몰라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클라라 주변을 서성인다. 당연히 영어수업도 시작하고, 열심히 임한다. 카페에서 클라라에게 영어를 배울 때,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가운데 주인공 질다가 부르는 아리아 ‘그리운 이름이여’가 흐른다. 카스텔라는 허밍으로 음을 따라 부르고, 클라라는 “이 노래 알아요?” 하며 반색한다. 카스텔라는 시작 음이 비슷한 다른 노래로 이어간다. ‘역시나’ 하며 실망한 표정의 클라라.
영화 ‘타인의 취향’(감독 아그네스 자우이, 수입·배급 백두대간, 1999)은 우리에게 묻는다. 취향에 고급과 저급이 있나요? 있다면, 그것이 사랑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가요? 진실로 취향이 고급과 저급으로 다른 이와는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데 취향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이 된다.
이 시점에서 카스텔라(장 피에르 바크리 분)에 대한 오해를 좀 풀어야겠다. 카스텔라를 경호하는 프랑크(제랄드 랑벵 분)와 운전기사 브루노(알랭 샤바 분)의 말마따나 카스텔라는 ‘저질’의 인간이 아니다. 단지 취향이 없는, 혹은 발달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클라라(앤 알바로 분)의 연기를 통해 절절한 사랑에 공감했고, 연극에 매료됐고, 문화의 세계에 입문한다.
수면 위로 올라온 취향이 다시금 발현된 곳은 갤러리다. 미술 전시회에 간 카스텔라는 추상화 한 점을 사는데, 클라라의 친구가 그린 그림이어서가 아니라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다. 카스텔라는 그림을 집에 건다. 고급 취향을 자처하는 인테리어 전문가인 앙젤리끄(브리짓 캐틸론 분)는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못마땅해한다.
클라라는 카스텔라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림을 사고, 공장에도 벽화를 그리려 하며, 자신의 친구는 카스텔라의 ‘호의’를 이용해 돈을 벌려 한다고 생각한다. 앙젤리끄는 제 맘대로 그림을 떼버린다. 카스텔라는 폭발한다. 진심을 담은 자작시로 건넨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상심만 했던 그가, 아내의 온갖 잔소리도 곧잘 넘겼던 그가 의사 표현을 또렷이 한다. 자신의 취향을 명확히 드러낸다.
(아내에게) “미치겠군. 이 집에 내가 고른 물건 있어? 내가 좋아하는 거 하나쯤 놔두면 안 돼? 여기는 완전히 인형 가게 같아! 분홍색에 온통 새랑 꽃 그림은 이제 지겨워!”
(클라라에게) “잠깐, 무슨 말이죠? 당신에 대한 내 호의를 이용해요? 난 그림이 좋아서 샀는데 뭐가 문제죠? 그 일 때문에 왔어요? 내가 왜 그림을 샀다고 생각했죠?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근사하게 보이려고? 좋아서 샀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날 그런 사람으로 봐요? 난 그 그림들이 좋아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날 좋아할 수 없다고 이미 말했잖아요. 당신 얘기가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취향이 확고해진 카스텔라는 아내 취향으로 휩싸인 집을 떠난다. 그리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를 얘기하는 입센의 연극 ‘헤다 가블레르’를 보러 간다. 헤다를 연기하는 클라라는 카스텔라가 공연을 보러 왔는지 노심초사 기다린다. 커튼콜에서야 보이는 얼굴, 불안하던 클라라의 표정엔 환한 미소가 드리운다.
이 결말이 표현이 서툴지라도 진심은 결국 취향을 넘어선다는 것인지, 같은 취향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각자의 취향이 생긴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인지, 예술을 사랑하는 것으로 취향이 같아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인지 확정하지 못하겠다. 각자의 취향대로 해석하는 게 정답일 듯하다.
다만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건 엔딩 스크롤이 오를 때 환하게 미소 지을 것이고, 미국식 코미디와는 다른 프랑스 코미디 영화의 색다른 재미에 빠져볼 만하다. 사실, 영화는 프랑크와 브루노 두 선후배 간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대하는 긍정과 부정의 태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프랑크와 마니(아녜스 자우이 분)를 통해 남녀관계에 있어 ‘옳다’는 기준이 얼마나 상대적인가와 선입견이 애정전선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도 탐구한다.
직접 확인해 보면 더욱 재미있을 이 다층적이고 심층적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카스텔라 역의 배우 장 피에르 바크리와 마니 역의 배우 아녜스(아그네스) 자우이가 함께 썼고, 아녜스 자우이가 연출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연인이고 그보다 오래 25년간 동료였다. 작가와 감독이 작품 안에 들어와 있는 영화, 영화 속 연극을 숨기고 있는 영화 ‘타인의 취향’, 당신의 취향에 꼭 맞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