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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㉓] 조선의 화승총, 프랑스 군의 총과 달랐을까?


입력 2021.04.06 14:33 수정 2021.04.06 14:33        데스크 (desk@dailian.co.kr)

한국 근대사에서 ‘서구 열강’이란?

1860년대 프랑스군의 제식소총ⓒ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

역사 서술에서 상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평가할 때는 대부분 이유가 있다. 특히 전쟁사에서 상대에 대한 과대 포장은 스스로의 빈약한 전과를 크게 부풀리기 위한 경우가 많다. 흉폭한 빌런을 우리의 용감한 군대가 어찌어찌하여 물리쳤다는 식이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영웅의 등장과 더불어 가족과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이름 없는 민초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관련 연구자들의 주요 관심 분야가 아니어서 과대평가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잘 몰라서 과대평가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병인양요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병인양요 당시 서구와 조선의 무기 등에 대한 오해이다. 특히 병인양요를 배경으로 한 여러 창작물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잘 드러난다.


이러한 창작물에서 기본적인 설정 중 한 가지는 ‘조선 무기를 압도하는 서구 무기’라는 대립 구도를 자주 발견한다. 보통 민초가 철저한 저항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조선의 구식 총과 서구의 신식 총의 대결을 볼 수 있도록 구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서두를 꺼낸 것은 적어도 병인양요 당시까지는 전부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최소한 육상전에 한해서는 더욱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사적 측면에서 조선의 부국강병 정책 역시 소총과 같은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증기선을 건조하거나, 대포를 제작하는 기술 등에 집중되었다.


조선군의 화승총ⓒ조선전쟁 생중계, 김원철 그림

조선의 부국강병 정책이 군사 전략상 소총보다 증기선과 대포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은 병인양요 당시 포수를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승리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전국적인 포수 동원 체제를 구축하여 유사시 대규모 소집이 가능한 체계를 만들고자 했다. 사람만 모아놓고 그들이 전쟁터에서 들고 싸우는 무기를 등한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 조선의 위정자들이 평가하기에 포수 모집시 들고 오는 화승총만으로도 서구의 병사를 상대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했다.


이러한 위정자의 판단에 대해서도 몇몇 창작물에서는 단지 그들의 ‘정신승리’라고 이야기한다. 진정 그들의 ‘정신승리’였을까? 이에 대해서도 역시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제 차근차근 근거를 풀어가보자. 근거 없이 이야기한다면 시쳇말로 ‘뇌피셜’일 수밖에 없으니까. 만일 근거가 분명하다면 한 가지 더하여 왜 그런 인식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을까?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전과의 과대 포장이나 연구자의 무관심 때문이었던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무엇 때문일까?


궁금한 점이 많지만 우선 근거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풀어가 보자.


뇌관식 소총ⓒ김병륜 촬영

우선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소총이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승총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뇌관식 소총을 사용했는데, 이 뇌관식 소총의 구조가 화승총과 거의 동일했다. 다만 격발 방식에서 화승이 아니라 뇌관을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선군 역시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뇌관식 소총을 진즉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 천보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소총의 발전 과정은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지만, 19세기에 크게 세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전장식 소총이 후장식 소총으로 변화한 것이다. 두 번째는 미니에 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무연화약의 흑색화약 대체를 들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대강의 변화를 의미하고, 세부적 변화까지 구분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군과 조선군이 사용한 소총이 실제 전투에서 성능상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구 군대 역시 대다수는 조선 정부가 소집한 포수처럼 총구에 탄환을 넣는 방식의 소총을 사용했다. 강화도에서 조선군에게 패퇴한 프랑스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군은 프랑스 전함과 대포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는 해전에 한정되었다. 반면, 전함과 대포가 없는 육전이라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병력이 압도적이라면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압도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위정자들 탁상에서 양인은 비록 해전에서 우세하다 해도 보급 등의 한계로 언젠가는 물러갈 존재였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이양선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시간을 끈다면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조선의 전략은 이러한 상황 판단을 바탕에 두고 수립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조선군에 비해 압도적이었고, 그 배경에는 소총을 비롯한 그들의 무기가 있었다는 인식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졌을까? 앞에서 언급한 소총의 세 가지 변화가 완성된 시기는 무연화약이 일반화된 1880년대이다. 그 전까지 서구의 무기가 다른 대륙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그러한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연구자가 전쟁사, 특히 무기 발달사 등에 관심이 부족했던 측면도 한몫 했으리라.


우리나라 역사학 연구자의 주된 관심사는 일제 식민사관의 극복에 있었고, 대표적으로 정체성론과 타율성론 등을 극복하는 것이 주된 문제의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정치 사상적 측면을 중심으로 역사학이 발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지만, 그 배경에 자리한 많은 것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역사 너머 역사’에서 주로 다루는 전쟁사와 국제관계사도 그 중 일부이다.


기존의 한국사 연구에서는 누가, 왜, 어떤 무기로, 어떻게 싸웠는지 등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전투사라는 측면에서 일부 다뤄지기는 하지만, 수천 년 전 손자(孫子)가 나라의 대사(大事)로서 죽고 사는 문제이자, 존립과 멸망이 걸린 문제라고 누차 강조한 것에 비하면 소홀히 다룬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이후 실제 존망의 갈림길에 놓인 조선을 전쟁사와 국제관계사라는 측면에서 이후부터는 살펴보고자 한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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