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총리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 질타
재보선 앞두고 선심형 포퓰리즘 남발 지적
지난해 코로나 이후 정치권의 관료패싱이 심상치 않았던 가운데, 새해 벽두부터 경제관료의 소신이 묵살됐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자영업 손실보상제 법제화에 난색을 표한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을 향해 강한 경고장을 날리고 입법 추진을 강행해서다.
코로나 지원을 법제화한 나라가 없고 각종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어 응당 나라 곳간을 책임지는 관료로서 책임발언을 한 것인데 정 총리는 이를 보고받자마자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격노했다고 한다.
국무총리라고 해서 나라 경제 전반에 관한 사정을 정확히 꿰뚫 수는 없다. 이에 경제 부처와 전문가들의 분석·연구가 필요한 것이고, 이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갈고 닦여진 정책이어야 현실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담당부처와 전문가 의견을 배제한 이번 정책 역시 정치권의 '표퓰리즘'에서 기인한 선심성 정책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관가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온다.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은 지난 20일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에서 손실보상제 입법화 문제에 대해 "해외 같은 경우 1차적으로 살펴본바 법제화한 나라는 찾기가 쉽지 않다"며 "피해가 발생하면 그때그때 정부와 국회가 논의해서 지원패키지를 짜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차관의 발언은 이날 앞서 정세균 총리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금년에 (손실보상제) 입법이 이뤄지도록, 가능하면 상반기 중에 제도 개선이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 직후 나온 것이라 주목할 만하다. 정치권의 입법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전에 김 차관이 나서서 기재부의 반대 입장을 우회적으로 전한 셈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김 차관이 우회적 반대 의사를 밝혔다는 보고를 받은 정 총리가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격노했다고 한다. 또 정 총리는 연합뉴스TV에 출연해 김 차관을 겨냥 "개혁 과정엔 항상 반대 세력, 저항 세력이 있지만 결국 사필귀정"이라며 질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 관료들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치권에서 내놓은 자영업 손실보상제 법제화에 대한 갖가지 우려가 나오고 있다. 가장 큰 난제는 비용이다. 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제시한 안은 손실보상 소요 비용이 월 24조7000억원에 달한다. 보상 기간이 5개월이라면 무려 123조5000억원이 들어가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재정 실태와 괴리되고 있다. 국가채무는 작년 11월 말 기준 826조2000억원을 기록, 전년 동기 대비 127조억원이나 늘었다. 통합재정수지 역시 63조3000억원 적자를 나타냈다. 가뜩이나 지난해에만 추경이 4차례나 편성된 터란 재정당국 입장에선 다시 수백조원대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지원 대상과 범위를 법으로 못 박아 놓으면 경계선이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의 불만이 폭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행정소송 제기 등 사회적 갈등과 비용이 더 커질 수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부작용에 대한 각종 우려가 나오고 있음에도 정치권에서 손실보상제를 밀어붙이고 있는데 대해 "올해 4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선심형 포퓰리즘이 남발하는 것 야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 총리가 경제관료를 대놓고 질타하면서, 그의 이력이 주목받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정세균 총리를 민생경제를 책임질 '경제통'으로 치켜세우고 있지만 사실 그는 정통 경제학을 수학한 이력이 전무한 법학도다. 정 총리는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해외와 국내에서 각각 경영학 석박사 과정을 지냈다. 이후 국내에서 정치학과 공공정책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에 비해 경제관료들은 외길 경제 전공학자들의 집합소다. 기재부의 홍남기 장관은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번에 정 총리로부터 질타를 받은 김용범 차관 역시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조지워싱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통이다.
관가의 한 관계자는 "김 차관은 국제 금융과 거시 경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거시경제통이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경제 전반에 대한 이해도와 식견이 굉장히 높은 분"이라며 "경제부처 관료들이 걸어온 길을 반추해볼 때 나라 경제의 자문을 구해야 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정치인들이 숙고 해봐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