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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②] 이승만→정한경 그리고 100년 전 미국 대선


입력 2020.11.10 15:44 수정 2020.11.10 15:47        데스크 (desk@dailian.co.kr)

정한경의 박사학위 수여식 장면(1921)ⓒ독립기념관 제공

미국 대선이 끝났다. ‘정상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민주당 바이든의 승리로 끝났지만, ‘대통령’으로 확정되기까지는 아직 험난해 보인다. 전 세계가 주목했겠지만, 한국도 경제, 외교, 국방 등 여러 주요 정책이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실시간으로 관심을 보였다. 100년전 미 대선을 바라보던 우리의 독립운동가 역시 마찬가지였고, 특히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던 이들에게 미 대선은 너무나도 중요한 변화였다.


100년 전인 1920년 11월 2일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민주당 콕스와 맞붙어 이긴 공화당 하딩의 선거 구호는 100년 후 바이든이 외친 ‘정상으로 돌아가자(Return to normalcy)’였다.


하딩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던 민주당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세계화 구상을 먼로주의로 대표할 수 있는 미국의 전통적 가치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국제연맹 창설과 이를 통한 세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이것을 하딩은 고립주의로 회귀하려 한 것이다.


트럼프 정책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바이든을 ‘당선인’으로 만들었듯이, 하딩 역시 세계대전 이후 미국 내 윌슨 정책에 대한 반감을 선거에 적극 활용했다.


특히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서구 유럽 국가의 요구로 아일랜드의 독립 지지를 철회하고, 독일과의 휴전 당시 체결한 약속 등을 파기했다. 이는 미국 내 아일랜드계 유권자와 독일계 유권자의 이탈로 이어졌다. 이들은 1916년 윌슨에게 표를 던진 이들이었다.


하딩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필요 한 것은 치유이며, 전쟁 영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윌슨이 주장한 새로운 혁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후 복구에 집중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전후 복구를 통해 우선 미국부터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America First) 것이다.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미국의 정책 변화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1918년 치러진 미국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미 국회의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이미 윌슨의 대외 정책은 미국 내에서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것은 그의 건강 악화와 연결되면서 사실상 정책적 레임덕으로 나타났다.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려고 윌슨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 유럽 열강은 겉으로는 세계대전을 끝낸 평화의 사도로 환영했지만, 정작 그가 내세운 여러 주장과 정책이 미 의회조차 통과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강화회의에서도 사실상 무시되었다.


1920년 미 대선을 위해 민주당과 공화당에서 경선을 시작하면서 윌슨 대통령보다 다음 대통령 후보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심은 당시 미국 내 한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0년 6월 미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하딩이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자, 그의 대외 정책을 미국 내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에 연재할 정도로 관심이 있었다.


하딩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 내 한인 사회에서 정한경의 위상이 급부상했다. 정한경은 1921년 아메리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하딩 대통령 부부와 첫 번째 줄에서 나란히 함께 사진을 찍었고, 이것은 그와 하딩 대통령 부부가 마치 친밀한 관계처럼 보이는 상징처럼 되었다. 이는 윌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마치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강조하던 이승만과 좋은 비교가 된다.


1919년 ‘신한민보’ (1919. 2. 6. ‘코리아는 자유를 위하여 윌슨께 청원’)에는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 총장 출신이니, 사실상 윌슨과 이승만은 사제지간의 밀접한 관계라는 식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는 어느 모임에서 윌슨이 미국 상원의원에게 이승만을 ‘장래 한국의 구세주’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윌슨의 사적 관계라도 기대하고 싶었던 당시 한인의 절박한 상황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 한인은 독립을 위해 이승만과 윌슨 간의 확인하기 어려운 사적 관계라도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친밀하다던 이승만의 파리행을 차단한 것 역시 윌슨 행정부였다. 이승만이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썼지만, 결국 이승만은 파리에 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러한 기대가 이승만에서 정한경으로 옮겨 간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당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면한 국제 관계의 현실이고, 임정은 이러한 엄혹한 현실을 넘어야만 했다.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으로 그 기세를 높이고 있는 일본을 상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그 어떤 단초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지만, 바이든의 대선 승리 선언은 100여 년전 독립운동이 직면한 절박함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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