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韓美 공세로 수세몰린 北中, 공조대응 천명
“악화 동맹관계 하루아침 복원…특수성 고려해야”
[칼럼] 韓美 공세로 수세몰린 北中, 공조대응 천명
“악화 동맹관계 하루아침 복원…특수성 고려해야”
지난 25일 오후 북한의 특급 열차가 단동을 거쳐 베이징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방중 목적과 앞으로 있을 남북회담과 미북대화에 미칠 영향에 국제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정은의 명확한 방중 목적과 결과가 발표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중관계의 특수성과 과거 미국을 대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외교 행태를 보면 유추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북한의 고위급 방중은 매우 전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뤄졌을 것이다. 북중은 한국의 평화 공세와 미국의 뜻밖의 대화 수락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이다. 북중관계는 김정일 사후 악화일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김정은이 혼자 한국과 미국과 독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든든한 후견인과 보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예기치 않은 대화 수락으로 동북아 및 한반도 문제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북한이 대화를 수락하면서 중국이 주장한 ‘쌍중단’과 ‘쌍궤병행’의 조건이었던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과 주한미군철수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중국에 대한 불신으로 이른바 ‘차이나 패싱’을 자행하면서 한반도에서 중국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일축시키는 것아니냐는 분석이 잇따랐다. 중국은 이를 회복하기 위한 돌파구 모색에 나섰다. 중국은 ‘양회’ 기자회견 자리에서 중국의 안보이익 관철과 건설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한반도 게임의 중국 지분을 역설했다.
악화된 동맹관계 하루아침에 복원하는 北·中
북중관계의 특수성으로 두 나라의 소원한 관계는 손바닥 뒤집듯 회복할 수 있다. 북중 양국은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갈등을 겪을 때도 있었지만 고위급 인사로 즉각 복원하는 사례가 많았다.
1956년의 연안파 종파 사건, 1960년대의 중국 문화대혁명과 북중 국경무력분쟁,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불만, 1992년 한중수교로 북중 양국 관계는 수년 간 소원해졌었다. 그러나 1958년, 1969년, 1989년 김일성의 방중과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의 방중으로 동맹관계를 하루아침에 복원했다.
이렇듯 북중 양국은 공산당이라는 특수한 정치주체가 양국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당의 언행 하나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 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회복될 수 있다.
북중 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3개의 역사적 사례에서 유추할 수 있다. 1964년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소련과 협의했다. 소련은 당시 중소동맹관계가 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소동맹의 유효성을 강조하고 실제로 파국의 원인이었던 국경분쟁에 대한 협상을 벌이는 모습을 보였다. 소련이 미국을 만류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사례는 1970년대 초 미국이 북베트남과 베트남 종전을 위한 파리평화협상에서 중국이 북베트남과의 동맹적 관계를 과시한 것이다. 미중관계 정상화를 위한 양국의 협상이 한창이던 1971년 미국은 중국에 북베트남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했다. 아니면 미국의 전쟁에서의 ‘명예로운 퇴진’도 없고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도 없다고 압박했다.
비록 북베트남의 동맹적 관계는 당시 중국에서 소련으로 이미 대체되었지만 중국의 내색은 없었다. 중국은 오히려 미국에게 협상에 적극 임하고 북위 20도선을 미군이 넘지 말아야할 마지노선으로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아닐 경우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에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1973년 1월에 타결했고 미군 철수도 1975년에 완료시켰다.
마지막으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북중동맹관계에 대한 중국의 확인이었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가 발발한 당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1994년 당시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고위 인사를 통해 북중동맹의 유효성을 북한이 침공을 받을 경우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확인해줬다. 이는 한국 대통령과 미국의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당시 미 대통령을 만류하는데 효과적이었다는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런 사례를 유추하면 북한과 중국은 동맹관계의 유효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과도한 외교적 공세나 압박에 공조할 태세로 임할 수 있음을 알리는 목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특히 북한은 중국의 후견으로 한국과 미국의 대화에서 ‘마지노선(레드라인)’을 설정하고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임하겠다는 전략적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일방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평화’공세와 압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북한이 굴하지 않도록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할 것이고 북한은 중국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 이제 공은 한국과 미국으로 넘어왔다. 중국을 다시 후견인으로 가진 북한은 우리를 순순히 운전자로 인정하지 않고 내칠 기세다. 이의 유일한 돌파구는 미국과 중국을 압박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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