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당의 세상읽기>무작정 다가가는 것은 대상을 소비해버려
며칠 전 밤 ‘퓨리’라는 영화를 잠자리에 누워 노트패드로 보았다. 영화 속에서의 대사,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란 말이 여운(餘韻)을 남겼다.
평화란 말은 아름다움이란 말로 바꾸고 폭력이란 말은 추악함이란 말로 바꿀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면 이상은 아름다운데 역사는 추악하다는 표현이 된다. 좀 더 쉽게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추악하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현실 생활에서 앞서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구차하거나 또는 슬프다는 말도 된다. 내 이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이유에서 이상은 아름답고 반대로 역사 혹은 현실은 추악한 것일까? 오늘의 주제이다.
먼저 그 이유에 대한 내 생각부터 밝혀두자. 아름다움이란 어떤 일정한 거리에서 주어진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움이란 어떤 간격에서 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 한다. 이에 대해 엄청나게 똑똑한 대철학자 칸트가 말하길 ‘아름다움이란 어떤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이라 했다. 나는 이 말을 딱히 이유가 없고 쓸모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란 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사랑스러운 것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고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러면 된 것이고, 우리에겐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본능이 있는가 보다.
오랜 세월 사진을 찍어왔고 그림을 그려왔다. 평생의 취미이고 즐거움이다. 사진을 왜 찍고 그림을 왜 그리는가? 하고 묻는다면 결국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이고 노력 때문이라 답하겠다.
사진을 찍는 현장에서의 얘기이고 경험이다. 당연히 좋은 사진을 찍고자 애를 쓸 것은 당연지사.
바깥에 나가 좋은 경치를 찾아서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면 그런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좀 더 다가가게 된다, 이끌리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경치에 이끌려서 자꾸 다가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아름다운 경치가 사라져버린다.
아니 왜? 하는 의문이 든다. 더 다가가서 보면 허접함만 더한다. 그러면 다시 반대로 돌아 나온다. 돌아 나오면서 바라보면 또 다시 아까 전의 좋은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추고 구도를 잘 잡은 뒤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한다. 좋은 경치 그리고 그것을 담은 아름다운 사진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나와 그 대상 간의 어떤 거리 혹은 간격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너무 다가서도 아름답지 않고 너무 멀리 떨어져도 희부옇게 변해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대상과의 딱 알맞은 거리에서만 존재한다. 좋은 경치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와 경치와의 어떤 간격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일종의 통찰에 속한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대상과의 거리에서 아름다움이 주어진다는 통찰을 얻었다.
바다를 예로 들자. 바다, 서울과 같이 내륙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바다를 좋아한다. 이에 바닷가에 갔다고 하자. 차에서 내려 송림이 우거진 그늘 사이로 하얀 백사장이 보이고 그 너머 푸른 물과 하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면 흥겹다.
그러면 사람들은 으레 그 곳으로 끌려든다. 야, 멋지다, 우리 물가로 달려가자 하면서 환호한다. 그런데 바다 쪽으로 다가가면서 광경이 바뀐다. 송림을 지나 백사장을 지나 정작 물가에 가서 서면 전혀 다른 경치가 된다. 오로지 물과 멀리 수평선만 보인다.
바다는 그 자체로서 꽤나 단순하고 밋밋하다. 물론 파도소리를 좀 더 가까이 들을 수 있고 멀리 아득한 지평선도 보이지만 사실 그냥 그렇다. 금방 질리게 된다.
아름다움은 바다 그 자체보다는 처음의 장소, 송림 그늘 사이로 하얀 백사장과 그 너머 파도치는 푸른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에서 주어졌던 것이다.
소나무 숲의 그늘, 희게 빛나는 백사장, 하얀 이빨의 파도, 그리고 남색의 바다, 훨씬 디테일이 풍부하고 그것들이 어울려서 멋진 바다 경치를 만들고 있던 것이다. 송림 바깥에 나가 사진을 찍으면 백사장과 바다만 남는다, 하나가 줄어든다. 더 걸어가면 바다만 남고 백사장이 빠진다.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다가가면 단순해지고 밋밋해질 때가 많다. 다시 되돌아 나오면 다시 아름다워지고.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면 우리들은 아름답던 시절로 기억할 때가 많다. 고생고생 하던 시절 또한 되돌아보면 아름다웠다고 즐거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니? 고생 심하게 했다면서 뭐가 아름답고 즐거웠는데? 하고 찔러 보면 그래도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답하는 이가 많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과거 세월과 지금 사이에 많은 거리와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아름다움의 비밀이다.
아름다움은 어떤 일정한 거리를 둘 때 주어진다.
아름다운 경치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알게 된다. 대충 그려야만 좋은 그림이 된다는 것을. 눈에는 멋진 디테일들이 생생하게 다 들어오지만 그것을 다 그려 넣다 보면 그림이 복잡해지고 나아가서 조잡해진다.
또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도 수시로 뒤로 물러나서 전체 그림을 보아야 한다, 전제적인 조화가 잘 맞아야지만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림을 그릴 땐 많은 것들을 생략하고 제외시켜야 한다. 먼 산의 능선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림 속에 강하게 그려 넣으면 이상해지는 것이고 가까운 사물을 희미하게 묘사하면 이상해진다.
더 좋은 그림은 멋진 것들을 그림 속에 묘사해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있는 것 같은 암시만으로 그칠 때이다. 결국 풍경화의 기술이란 사물마다 어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꾀하는 방법이다.
대중 스타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이 선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은 팬들과의 적절한 거리에서 온다. 그렇기에 그들을 관리하는 기획사들은 적절한 노출 빈도와 적절한 거리두기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하지만 결국 세월이 흘러 노출이 누적되다 보면 인기가 시들게 된다. 총량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누구나 그 사람 곁으로 다가서고자 한다. 곁에 있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 때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고 만지게 되고 서로 부비다 보면 좋아하는 감정이 빠져나간다. 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할 법도 하다. 꽃은 아무리 가까이 다가서서 들여다보아도 아름답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거리를 두지 않아도 아름답다는 말인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가끔 보고 만나야 아름다운 법이지, 늘 꽃 곁에 있다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꽃이 좋아 꽃가게를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꽃이 처음처럼 아름답냐고?
꽃가게 아줌마에게 있어 꽃은 그냥 팔아야 하는 상품일 뿐이다. 손님들이 좋아하면 그것으로 만족인 것이고.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실로 많다. 하지만 거리를 두지 않았을 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과연 있기나 할까 싶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것은 가족이란 대상이다. 남편, 아내, 자녀, 이런 대상들이다. 거리를 두지 않고 살다 보면 수없이 감정이 굴절되고 또 변화해간다.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미운 정도 들고 정말 미워할 때도 있고 그러다가 다시 예뻐 보이는 것이 가족이다. 미운 정 고운 정의 대상이다. 어쩌다가 떨어져 지내다 보면 한없이 그리워지는 가족이고 그러다가도 다시 함께 지내면 전혀 아무렇지도 않고 덤덤해지는 관계.
그렇기에 부모님, 남편 그리고 아내 특히 내가 낳은 자식은 아름다움의 기준을 넘어서는 대상이라 하겠다.
이제 정리한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하는 노랫말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 무작정 다가서는 것은 대상을 자칫 소비해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하겠다. 이에 아름다움을 즐기고 추구하면서 살고 싶다면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기술 혹은 기량을 가다듬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글/김태규 명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