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vs알파고, 누가 이기든 '인간승리'의 역사
낯선 분위기 속 치른 첫 대국서 이세돌 완패
남은 대국 승리 전망 우세 "알파고도 인간 작품"
바둑 세계 최강자 이세돌(33) 9단이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충격적인 불계패를 맛봤다.
이세돌 9단은 9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서 알파고와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1국에서 186수 만에 돌을 던졌다.
흑을 잡은 이세돌 9단은 대국 초반 알파고의 강력한 공세에 주도권을 내주기도 했지만 침착하게 대국을 치르며 점차 판세를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갔다. 90-100수 정도에 이르면서 우세한 형국을 만들었다.
이후 알파고가 불리해진 판세를 뒤집기 위해 이세돌 9단이 우상변에 지어놓은 집에 침투하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세돌 9단이 이 같은 알파고의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우상변의 흑집이 백집으로 바뀌면서 판세는 다시 알파고 쪽으로 기울었다. 이세돌 9단은 다시 판세를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알파고의 대국 운영은 더 이상의 반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돌 9단이 돌을 던지기 전 흑집과 백집은 반집 정도 차이. 하지만 이세돌 9단이 흑을 잡았기 때문에 끝내기에서 7집 반을 백에게 덤으로 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실제로는 알파고가 7집 정도 앞선 셈이었다. 대국이 막바지 사실상 뒤집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음을 판단한 이세돌 9단은 186수 만에 돌을 던졌다. 알파고가 세계 최정상 프로기사와 정면 대결해 이긴 최초의 인공지능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대국을 앞두고 이세돌 9단은 다섯 판 가운데 한 판이라도 지면 자신이 지는 것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강한 자신감을 피력해 왔다. 사실상 5-0 승리를 자신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은 5차례의 대국 가운데 첫 판부터 계가도 하기 전에 돌을 던지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 항복을 선언한 이세돌 9단도 당혹스러운 상황이지만 현장에서, 그리고 TV와 인터넷, 모바일을 통해 대국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 역시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프로기사로서 인류를 대표해 대국에 나선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과의 대국에서 패했다는 것은 결국 한국 바둑의 자존심 이전에 인간계 바둑의 자존심이 매우 쓰라린 상처를 입은 셈이기 때문이다.
바둑은 돌을 놓는 경우의 수가 우주의 원자보다 많은 복잡성으로 컴퓨터가 정복하기 가장 어려운 게임으로 여겨졌다. 알파고가 지난해 10월 유럽챔피언 판후이 2단을 5-0으로 완파하기는 했지만 ‘인류 대표’로 나선 세계 최정상의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을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알파고가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기보를 학습해 바둑에서 나올 수 있는 엄청난 경우의 수를 분석하고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3-4수 앞을 내다보는 수 싸움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예상치 못한 수에 대처하는 임기응변 능력에서 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가 이날 보여준 기력은 판후이 2단을 꺾었던 5개월 전보다도 훨씬 향상되어 있었고, 이세돌 9단과의 수 싸움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세돌 9단은 이날 알파고가 범한 실수가 이미 계산된 것일 가능성까지 제기하기도 했다. 알파고가 대국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국 중간에 일정한 노림수가 숨겨진 실수를 고의로 저질렀다는 의미다.
이세돌 9단은 앞으로 남은 4차례의 대국에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판후이 2단과 마찬가지로 0-5 완패를 당할까.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이세돌 9단이 마냥 알파고에게 당하지만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이날의 대국은 두 사람의 인간이 반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서로의 기운과 감정을 교환하는 과정 속에 수 싸움을 벌이는 분위기가 아니라 시끌벅적한 IT 기술 관련 이벤트 무대의 분위기로 치러졌다.
이세돌 9단이 익숙한 대국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집중력 끌어올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세돌 9단이 이날 자신의 온전한 실력을 다 발휘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반해 기계인 알파고는 주변 분위기나 상대방의 감정 상태 내지 표정에 따라 함께 감정에 기복을 겪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이세돌 9단의 입장에서 보면 흑을 잡음으로써 백에게 7집 반의 덤을 줘야 하는 불리함과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핸디캡까지 안고 대국을 치른 셈이다.
따라서 남은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이전과는 다른 대국장 분위기에 적응하고 알파고의 돌발적인 수에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대국을 이끈다면 의외로 낙승할 수도 있다. 남은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세계 최정상의 프로기사로서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을지, 아니면 알파고가 그야말로 인공지능 개발사에 새 장이 열렸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
하지만 알파고 역시 인간의 능력으로 개발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은 누가 이기든지 인류 역사에서 거둔 대표적인 인간 승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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