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이제는 품격>이성보다 야성(野性) 가르쳐야
인권보다 인격, 인성보다 인품, 복지보다 국격이 먼저
세계 최초의 다민족 연방 국가 단군조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격찬해 마지않는 한국의 교육 현장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런 나라 군대에선 왜 자살, 구타, 성추행이 끊이지 않는가?
동물원에서 자란 맹수를 야생에 풀어놓으면 사냥할 줄을 모른다. 사자나 호랑이 우리에 토끼를 산 채로 넣어 주면 그저 쳐다보기만 한다. 심지어 교미를 위해 짝을 지어 줘도 어찌할 줄을 모른다. 해서 먹이 속에 흥분제를 넣어 주거나 같은 동물들의 짝짓기 동영상을 틀어 주면서 뒤늦게 학습을 시킨다고 야단이다. 그렇게 해서 어쩌다 새끼를 낳아도 이번에는 돌볼 줄을 모른다. 스트레스를 받아 새끼를 물어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이 다반사다. 야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곤충 등 대부분의 하등동물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생존기술을 지니고 나온다. 어미에 의한 학습 없이 생체리듬에 따라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조류나 포유류 등 대부분의 고등동물들은 태어나서 일정 기간 어미의 보살핌을 통한 학습이 없이는 야생에서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젖을 두고 생존 경쟁을 벌이고 배부르면 무리의 또래들과의 몸싸움으로 시간을 보내며 갖가지 능력을 길러나간다. 힘겨루기, 먹이 사냥, 적으로부터 도망가기, 공동체 내의 위계질서에 순응하기, 짝짓기 등등 학습할 것도 여간 많지 않지만 어느 것 하나라도 빠트렸다면 일찌감치 다른 동물의 먹잇감으로 생을 마칠 수밖에 없다.
가장 긴 학습기간을 갖는 동물은 단연 인간이다. 게다가 인간은 문명이란 독특한 생존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여 문명이 발달한 만큼 학습기간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수명도 같이 늘어나 삶의 단계가 적당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명의 학습이 없는 상태로 야생에 내쳐진다면 동물원 출신 맹수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굶어죽을 것이다. <타잔>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예전에는 어느 집안이나 대개 형제가 많았다. 그렇지만 오늘날처럼 아이들이 놀 만한 오락거리가 없어 산이나 들을 쏘다니거나 방 안에 이불 펴놓고 씨름하며 자랐다. 자연 속에서 절로 야성을 키워나갔으나 문명화, 도시화되면서 그런 기회마저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바퀴벌레 한 마리만 보고도 벌벌 떤다.
동물적 소통과 인격적 소통
눈뜬 심봉사는 심청이를 알아보았을까? 몇 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아이온 파인 박사팀은 40년 전, 그러니까 세 살 때 시력을 잃고 눈이 먼 마이클 메이의 시력을 각막 줄기세포 이식수술을 통해 회복시켰다. 그리하여 메이는 사물의 빛깔이며 형태, 움직임 등을 정상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메이가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의 얼굴, 즉 감정 표현을 알아볼 때 기능하는 뇌의 특정 영역이 퇴화되었거나 이미 다른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유년기, 즉 뇌세포가 대폭 증가하는 시기, 학습을 통해 정보를 지정된 영역에 저장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인식 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뇌의 크기와 함께해왔다. 신생아의 뇌무게는 400g 정도이지만 태어나서 3세까지, 4~7세까지, 그리고 10세 직후까지의 3단계의 발달을 거쳐 20세 정도에서 완성되는데 뇌세포가 부쩍 증가하는 시기는 성징기와 같이한다. 따라서 이 3단계 과정을 통해 유인원 시절의 학습과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어미 품으로부터 내쳐지는 시기, 스스로 독립할 시기, 생식 능력을 갖추는 사춘기에 뇌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바로 그 시기에 보다 많은 외부 자극에 의한 학습 정보를 축적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생물은 수억 년 혹은 수천만 년 동안 각 개체가 진화해 온 과정을 똑같이 되풀이한다. 인간 역시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순간부터 수억 년 동안 조상들이 진화해 온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반복해야만 온전한 복제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생후 생존을 위한 학습 또한 일정 기간 내에 똑같이 전승되어야 정상적인 독립생활을 할 수가 있다.
유소년기에 반드시 체득(體得)해야 할 소통 매너
요즘 결혼한 젊은 부부들 중에 섹스리스 부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섹스를 혐오하는 이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섹스에 대한 욕구 자체가 일지 않는단다. 그럼 어떻게 함께 사느냐고 물으면 뭐 어떠냐며 같이 대화하고 놀러다니고 게임도 하며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는 부모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손주를 기다리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지금처럼 성(性)문화가 범람하는 시대에 설마 하고 반신반의하는 어른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미 동성애와 같이 흔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적게 낳아 고이 키우겠다는 것은 자칫 인간의 야성 중 그나마 남은 생식 능력까지 상실할 위험을 높이고 있다. 예로부터 양반집 종손 족보치고 양자들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강아지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끼리 내버려두면 반드시 서로 밀고 당기고 싸우게 마련이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동물적 감(感)을 익힌다. 젖을 빨며 엄마와의 눈맞춤을 통해 터득한 눈치를 사회적 소통 능력으로 키워 나간다. 그리하여 상대를 척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를 간파해낸다.
저보다 강한지 약한지를 가늠하는 것은 물론 우군으로 삼을지 적군으로 밀어낼지, 어느 정도로 장난치고 놀아야 할지, 도망가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엄살을 피워야 할지, 항복해야 할지, 계속 버텨야 할지, 강한 자에게 붙을지, 약자끼리 합쳐 강자를 밀어낼지 등등. 이런 감을 피부와 근력과 눈치를 통해 반복 학습하는 것이다. 어디 놀이뿐이랴. 요리, 설거지, 청소도 감으로 한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다.
한데 요즘 아이들은 원천적으로 이런 학습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만 낳아 잘 기르려고 하다 보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도 다른 아이들과 몸싸움을 할 기회가 없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남들과 온몸으로 부대끼는 씨름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아이가 수두룩하다. 게다가 근자엔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체벌마저 없어져 버렸다.
마땅히 유아기에 익혔어야 할 동물적 소통 능력을 배우지 못한다. 모조리 공부벌레, 시험기계. 인격이 아니라 동물격 혹은 로봇격이다. 해서 눈뜬 심봉사처럼, 마이클 메이처럼, 섹스리스 부부처럼 교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른’ 세대가 쏟아져 나오는 작금의 한국사회가 소통 불능으로 혼란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병영사고는 전근대적인 군사문화 때문?
요즘도 한국의 기업들은 사원 ‧ 임원 가리지 않고 해병대 입소훈련, 국토순례, 산악훈련, 마라톤 등 온갖 극기훈련을 시킨다고 법석을 떤다. 심지어 대학생들도 이를 흉내내다가 뻑하면 사람 잡는 대형 사고를 낸다. 유소년기에 학습했어야 할 동물적 소통 능력과 연대의식을 뒤늦게 가르치려다 보니 무리가 따른 것이다.
유아기 때 익히지 못했으면 제도권 학습을 통해서라도 익혀야 하지만 이 나라 교육 환경은 그렇질 못하다. 학교체육을 억지로 부활시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영수에 밀려 뒷전, 그마저도 줄넘기나 공기놀이와 같은 실내 오락 수준이다. 씨름이나 기마전 같은 과격한 놀이가 야성의 회복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학부모들의 호들갑 때문에 감히 엄두도 못 낸다. 게다가 대부분 여선생들이어서 몸싸움 체육은 아예 구경도 못해 보고 학교를 마친다.
이런 세대가 드디어 군(軍)에 가면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더없이 착한 우리 아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눈치가 없고, 느리고 답답해서’ 상관이나 동료들로부터 구박과 왕따를 당하는 것이다. 육군 사병의 4분의 1이 관심사병이라 한다. 관심학생이 그대로 옮아간 것이다. 더불어 학교폭력도 따라갔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격 개념 없는 계급이나 권력은 더없이 훌륭한 폭력의 도구로 작금의 대한민국은 그 실험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군대에서 그치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문제아동, 관심학생이 관심병사가 되고, 이들이 다시 관심사원, 관심상관, 관심가장이 되는 날 직장이나 가정에서 뻑하면 왕따, 가혹행위, 성폭력, 자살, 투신이 일어날 것이기에 말이다.
노인층의 증가보다 더 무서운 젊은이들의 야성 상실
소통에는 두 가지가 있다. 동물적 소통과 인격적 소통이다. 동물적 소통 능력은 유소년기에 폭력행사(놀이)를 통해 길러야 하고, 인격적 소통 능력과 배려심은 인간존엄성을 기초로 한 매너나 스포츠를 통해 습득해야 한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어미 품에서 내쳐지는 세 살 적부터 매너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과 매너는 인성이 아니라 인품이란 점을 일러주고 있다.
필자도 요즘 대학생과 기업의 젊은 사원들을 대상으로 품격경영을 강의할 때가 가장 힘들다. 모두들 눈은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도무지 반응이 없다. 흡사 마네킹들을 앉혀 놓은 것같이 썰렁하다. 한데 강의 평점은 대박이어서 어이가 없다. 이게 세대 차이인가? 상대의 말에 실린 무게와 의도, 농담이나 비꼼, 은유나 비유 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데다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이 없어 즉각적인 피드백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하여 윤일병 사건에서 보듯 맞는 사람이나 때리는 사람 사이에 동시적인 소통과 교감이 이뤄지지 못한다. 이렇게 맞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저항을 하든, 도망을 치든, 엄살을 피우든, 자신의 고통의 정도를 온몸으로 표현(연기)해 내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계속 맞는 것이다. 폭력을 가하는 쪽도 미련스럽긴 마찬가지. 이렇게 때렸다간 책임질 수 없는 사태로까지 갈 수 있다는 감(感)도 못 잡고 무작정 때린다. 상대에 대한 인식, 배려에 대한 기본 바탕이 없어서이다.
서로 교감이 안 되면 사람을 자칫 물격(物格)으로 여기게 된다. 해서 부모 자식조차 귀찮다고 죽이거나 버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반대로 교감이 되면 동물조차 인격으로 여기게 된다. 애완동물을 가족 혹은 자식처럼 대하는 경우가 그렇다. 과도한 신체 접촉과 눈맞춤이 사람과 동물 사이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게임에 중독되어 자식을 팽개쳐두거나 때려서 죽게 만드는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운동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부상은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체벌과 상처의 쓰림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축적시킨다. 그리고 그 끔찍한 기억은 자살의 유혹을 덮어씌우는 기능을 한다. 한데 현대의 어린이들은 그런 경험을 좀체 가지지 못한다. 무릎팍 한번 까여 보지 않은 아이가 공부만 하다가 군대나 직장에 들어갔다가 갑작스레 닥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그 중 몇몇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다. 입시경쟁과 엘리트체육에 밀려 학교체육을 홀대한 결과가 빚은 끔찍한 현실이다. 이는 결코 인성교육이나 정훈교육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성(人性)이 아니라 인품(人品)이다
인간사회도 본질적으로 동물세계다. 문명적 매뉴얼만으로 유지될 수만은 없다. 제아무리 선한 마음과 윤리적 사고를 지녔다 해도 그걸 밖으로 표현해 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동물적 소통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면 인격적 소통 능력이라도 길러야 하지만 이 나라 교육계에는 그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것 같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인성교육 운운하지만 기실 인성은 바뀌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지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외(外)로써 내(內)를 다스리는 것, 인성을 다스려 인격, 인품으로 드러내는 그 도구가 바로 매너다.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유학(儒學)이란 매너학이다. 어린이집 CCTV, 유명 대학, 엄격한 병영, 대기업, 안전한 공직이 아이의 장래를 온전히 지켜주는 것 아니다.
인권보다 인격을, 인성보다 인품을, 복지보다 국격을 먼저 챙기지 않으면 대한민국 미래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 동료들끼리 땀을 섞는 학교체육의 부활,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토론식 수업, 매너를 통한 품격교육이 당장 시급하다. 귀하게 키운다고 잘 키우는 것이 아니다. 이성보다 야성이 먼저다. 때로는 거칠게 키워야 한다. 잘 다스려진 야성을 우리는 덕(德)이라 한다.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지 고민할 때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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